예전에 즐겨 들었던 음반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시절 그 때의 제 자신에 대한 향수 때문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옛날 게임들이 그런 류에 속하는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예전 게임이 하고 싶어지고 거기에 꽂힐 때가 있습니다. 요 얼마 전에도 그랬죠.
비슷한 로직으로 여름마다 찾게 되는 게임 하나가 또 있는데 그게 미러스 엣지(Mirror’s Edge)입니다. 그냥 이번에도 갑자기 미러스 엣지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미러스 엣지는 맨 몸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파쿠르를 게임으로 구현한 게임입니다. 기본적으로는 FPS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플랫포머 게임처럼 점프하고 장애물을 피해야하고, 적도 대부분 죽이는게 아니라 도망다녀야 합니다. 생긴 것과 다르게 <페르시아의 왕자>랑 더 비슷한 게임입니다.

미러스 엣지는 출시된지 꽤 지난 고전 반열에 든 게임임에도 스팀덱의 호환성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스팀과 스팀덱의 장점이라면 이런 구세대 콘솔 시절의 게임도 쉽게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겁니다.(기본적으로 PC니까 당연한거지만) 워낙 오래된 게임이라 스팀덱에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실행됩니다.

미러스 엣지는 파쿠르 게임 답게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근미래의 언젠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아마도 도쿄인 것 같은데, 도쿄 정도로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어야 파쿠르가 가능할테니 당연한 선택이죠.
파쿠르는 스포츠라고는 하나 실제 빌딩에서 하는건 엄연한 불법이다보니, 미러스 엣지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사법지대 밖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물론 주인공은 정의의 편이니 부당하고 지나친 도시의 통제와 감시를 피해서 자유를 위한 ‘정보’를 배달하는 투사여야 말이 되겠죠. 그래서 이 게임도, 2018년에 나온 후속작 <미러스 엣지 : 카탈리스트>도 서사는 동일합니다.
스토리가 나와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에서 스토리는 그냥 양념입니다. 2018년에 나온 후속작도 동일한데 심지어 두 게임은 주인공이 같은데 아예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달려라 하니’와 ‘천방지축 하니’ 같은 관계랄까요.
게임을 클리어하고 난 다음에도 어떤 이야기였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쁜놈들이 총을 쏘고, 나는 그걸 피해서 달리고 달릴 뿐인 게임입니다. 한우물만 판다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죠.

제가 이 게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점은 그래픽입니다. 요 그래픽 때문에 여름에 찾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그만큼 눈부시게 하얀 건물들의 대비가 주요 특징을 이룹니다.
근데 게임을 자세히 보면 색깔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한 화면에 등장하는 색이 세가지 이상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등장하는 식물들도 하얀색인데 이 선택은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합니다. 파란 하늘과 그에 못지 않게 눈부신 건물들은 아름답지만 색이 없어서 더 삭막한 느낌을 줍니다.

색이 없는 대신 “러너스 비전”이라는 시스템으로 가야하는 길의 오브젝트는 빨갛게 표시됩니다. 온통 하얀 세상에 빨간색으로 갈 길을 명확히 알려주니 초행길이어도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길을 갈만한 컨트롤 능력이 되느냐지만 말이죠.
이런 의도적인 선택으로 미러스 엣지의 그래픽은 시간이 지난 지금봐도 꽤 세련되어보입니다. 인물 그래픽이 나오지 않는한 플레이스테이션3 시절의 게임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문제는 멀미인데, 이게 좀 심합니다. FPS 장르 자체가 멀미에 취약한 장르인데 단순히 총을 쏘는게 아니라 뛰어다니고 건물 사이를 날라다니고 하는데다 속도감을 주기 위해 1인칭 시선의 카메라도 뛸 때마다 흔들리니 아무리 멀미에 강해도 오랫동안 플레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 게임의 흥행이 그저그랬던 것도 이 멀미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입니다.
스팀덱으로 누워서 두시간 정도 플레이해봤는데 그 사이에 적응이 된건지, 스팀덱의 작은 화면이 오히려 멀미에는 도움이 되는건지, 아니면 걍 나이가 든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크게 멀미 문제 없이 플레이할 수 있었습니다.
후속작인 카탈리스트도 게임패스를 통해 플레이해봤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리지널 미러스 엣지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훨씬 파쿠르라는 본질에 맞게 깔끔하고, 게임에 등장하는 건물도 현대적이라 그래픽이 사실감 있습니다. 카탈리스트는 배경이 약간 더 미래로 가버리면서 그래픽은 더 좋은데 사실감은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어쨌든 모처럼 잡은 게임이니 켠 김에 왕까지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