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를 클리어했습니다. 상반기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 2025년 GOTY(Game of the Year)로 언급되는 게임입니다. 워낙 최근에 유명한 게임이라 관심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현재 구독 중인 게임패스에 데이원으로 포함 되어있어서 플레이해볼 수 있었습니다.
예전 글에도 썼지만 개인적으로 RPG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위처나 사이버펑크도 사놓고 결국 클리어하지 못했고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도 RPG 요소를 도입하면서부터 관심이 끊겼습니다. 심지어 젤다의 전설도 사놓고 초반만 플레이하고 중단한 상태입니다.
RPG는 장르를 불문하고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장르가 턴제 RPG입니다. 개인적으로 턴제 RPG는 게임 시스템의 한계가 있던 시절에 탄생한 비현실적인 전투 방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게임 시스템이 발전함에 따라 이미 실시간 전투가 가능해졌는데 굳이? 아직도 턴제를? 이란 생각이 강합니다.
그런 제가 턴제 RPG인 이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결말까지 끌고간 것만해도 이 게임은 GOTY를 받을만한 게임입니다. 완성도가 취향을 이긴 케이스랄까요.
제가 이 게임을 끝까지 끌고 갔던 힘은 세가지입니다. 하나는 턴제 RPG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참신한 시스템, 또 하나는 아름다운 그래픽과 흥미로운 스토리입니다.
참신한 턴제 RPG
일단 게임 시스템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이 게임은 턴제 RPG지만 회피와 쳐내기(패링)가 존재하는 액션 게임입니다. 턴을 주고 받는 방식이지만 상대방 차례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맞기만 해야하는 다른 턴제 RPG와 달리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적극적으로 쳐내고 반격하는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쳐내기와 피하기만 잘 한다면 한대도 맞지 않고 끝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한 턴에 적들이 엄청나게 때려대고 엇박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요. 하지만 액션 게임처럼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건 아니고 리듬감과 정확한 타이밍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턴제 RPG 임에도 전투시 피로도는 개인적으로 아머드코어6보다 더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제가 턴제 RPG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부분을 어느정도 승화합니다. 마치 아주 쓴 약에 슈가코팅한 것 같죠.
그 외에도 던전에서 무작위로 적이 출몰하는 랜덤 인카운터를 삭제한 부분, 휴식하면 초기화되는 물약 시스템, 무기 외에는 장비가 전무한 부분 등 전통적인 RPG에서 복잡하고 불편하게 느껴질만한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재해석했습니다. 그래서 RPG를 싫어하는 저도 어느정도 참고 하는게 가능했던거죠.
아름다운 그래픽
게임에서 마음에 들었던 또 다른 한가지는 아름다운 그래픽입니다. 게임 속 루미에르란 도시와 그 세계는 18세기 ~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요즘 워낙 최적화가 개판인 게임(제다이 서바이버..등)을 주로 했다보니 이 정도 그래픽에서 캐릭터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초반엔 아이패드 프로로 미러링해서 했었는데 120 프레임에 HDR 디스플레이에서 보면 정말 인상적입니다.(후반으로 갈수록 120 프레임 방어가 제대로 안되어서 결국 맥북으로 마무리했지만)


개발자가 33명인 소규모 스튜디오에서 그것도 첫 개발에 이정도 퀄리티를 뽑아낸게 대단합니다. 그래픽이 워낙 매혹적이라 패링에 집중하느라 전투가 피곤하고 지치는데도 다음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를 기대하면서 계속 플레이했던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스토리
스토리 측면에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게임속 루미에르란 도시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 곳인데 이미 황폐화되었고 인류는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어느 순간 세상에 나타난 ‘페인트리스’가 거석에 숫자를 그리기 시작하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나이의 사람들은 전부 고마쥬(사라짐)됩니다. 게임 초반부에 34 라고 써있었는데 이 숫자가 지워지고 33이 되자 34 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습니다. 이렇게 한 해 한 해 짧아지는 수명을 기다리다가 결국 모든 인류가 절멸하는 절망적인 세계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페인트리스’를 제거하러 인류는 원정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첫 원정대를 제외하고 99, 98, 97, … 34, 33 원정대까지.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33 원정대는 인류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원정길에 오릅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을 구하러 떠나는 왕도적인 JRPG이지만 스토리는 왕도적으로 흘러가진 않습니다. 전통적인 턴제 전투 시스템을 비틀었던 게임 시스템처럼 스토리도 기존 RPG의 전개를 몇번이나 비틀면서 흘러갑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왕도적인 전개도 좋지만 이런 스토리도 잘만 푼다면 매력적이죠.
진짜 턴제 게임의 구원자인가?
클레르 옵스퀴르 : 33 원정대 플레이 이후 사람들은 진정한 전통 턴제 RPG의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반응입니다. 턴제 RPG의 원조격인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부터 서서히 턴제 시스템을 폐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마당에서 일본도 미국도 아닌 프랑스에서 만든 게임이 이런 평가를 받게 될 줄은 몰랐더랬죠.
하지만 제 생각에 클레르 옵스퀴르 : 33 원정대가 정말 턴제 게임 장르의 구원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턴제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지만 오히려 턴제 시스템의 여러 불편한 부분을 액션 게임, 리드 게임 요소를 가져와 ‘슈가 코팅’해놓으면서 역으로 턴제 게임을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턴제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지만 그래도 턴제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비디오 게임 이전부터 내려오던, 바둑이나 장기 등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게임들에서도 내려오던 전통이죠. 그 여유 속에서 다양한 전략을 조합하고 적들의 특성을 분석해가며 상황에 따라 최선의 전략을 통해 적을 이기는게 턴제 게임의 매력인데, 이 게임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략보다 빠른 반사 신경이 게임을 풀어나가는데 10배는 더 유리합니다.
반사 신경이 더 유리하다면 굳이 실시간이 아닌 턴제 RPG여야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다크소울이나 아머드코어 같은 게임이랑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재밌게 하면서도 후반부로 갈 때까지 100번 이상의 전투를 치르면서 이런 의문은 계속 들었습니다.
턴제 게임이지만 사람들이 턴제 게임에서 싫어할만한 요소를 제거하고 액션 게임의 요소를 넣으면서 오히려 턴제 게임을 부정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무리 – 어쨌든 재밌으면 장땡
뭐 장르적 특성이야 어떻든 저 같은 RPG + 턴제 전투를 싫어하는 사람을 끝까지 가게 만들었으니 정말 매력적인 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게임하기 전만해도 올해가 아직 5월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GOTY 이야기가 나오는게 오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플레이해보니 정말 그럴만한 게임인 것 같습니다.
최근 모바일이고 PC건간에 양산형 게임이 나오는 와중에 오랜만에 신선한 AAA급 게임이었다는게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기존 IP도 아니고 기존에 익숙한 시스템도 아닌 방식의 게임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대형 메이저 제작사에서 만든 게임이 아니라 가능했던 거겠죠.
플레이 시간은 저 같은 경우 메인 스토리 중심으로 했는데 정확히 30시간 정도 플레이한 것 같습니다. 이곳저곳 탐험하다보면 60시간 정도 플레이할 수 있다고. 가격도 요즘 게임 대비 저렴한 편(44,900원)이라 추천할만한 게임입니다. 게임패스에 포함되어있으니 게임패스를 통해 플레이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다만 클라우드 게임의 경우 콘솔 30 프레임에 고정되다보니 좀 아쉽더군요.)
덧. 클레르 옵스퀴르라는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게임을 부를 때는 그냥 ’33 원정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클레르는 빛, 옵스퀴르는 어둠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합니다.(즉, 명암) 저도 후반 쯤에야 이 게임 제목의 의미를 알았는데 카메라 옵스큐라 를 떠올렸거든요. 옵스큐라가 어둠이라는 뜻일테니 클레르는 빛이겠네, 하고 찍었는데 맞았습니다.
덧2. 저는 클레르 옵스퀴르라는 게임 제목보다 게임 내에 나오는 종족 중 ‘제스트랄’이라는 종족 이름이 계속 외워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네요.
덧3. 턴제 게임이다보니 보스의 경우 전투 시간이 상당히 긴 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최종 보스를 잡는데 1시간 42분 걸렸다고 해서 놀랬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중간에 켜놓고 밥 먹고 와서 더 길어진듯. 하지만 거의 1시간 가까이 걸린 건 맞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