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사용자가 스팀덱에 게임을 외주화하기까지

이 블로그를 보시는 모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사용하는 주요 디바이스는 전부 애플 제품입니다. 2010년 맥북 에어를 기준으로 10년 동안 하나씩 모으다보니 벌써 아이폰, 맥북 에어, 아이패드 프로, 애플워치 울트라, 에어팟 프로, 애플 TV 까지 애플의 거의 모든 제품 라인을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애플까에 가까웠던 제가 이렇게까지 된걸 보면 세상 일은 참 모를 일인 것 같습니다.

10년 동안 여러가지 작업을 애플 플랫폼 기반으로 바꿔왔습니다. 사실 원래도 윈도우가 아니라 우분투(리눅스)를 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리눅스에서 맥OS로 전환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주로 대부분 오픈소스 툴 덕분이었죠. MS 오피스 대신 LibreOffice로, 브라우저는 파이어폭스로, 포토샵 대신 GIMP로, 하나씩 작업 환경을 맥으로, 아이패드로 바꿔왔습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무수한 도전 끝에 결국 전환에 실패한 분야가 바로 게임입니다. 그동안 Wine으로도 해보고, 원격으로도 해보고, 클라우드로 해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애플 플랫폼에서는 게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실행되는 게임이 많지 않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아이폰 아이패드에서 실행되는 모바일 게임들은 이젠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다른 형태로 진화 중이었고, 맥OS는 실리콘 이주 이후 제 성능으로 게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플랫폼 전체에 걸쳐서 컨트롤러의 데드존 이슈가 있어서 원격으로 플레이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스팀덱을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하다가 현타가 하나 왔는데, 스팀덱에서 M2 맥북 에어에서 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거나 성능 문제가 있었던 게임들이 훨씬 원활하게 실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롯 해상도를 720p로 제한하더라도, 똑같이 세팅을 맞춰도 스팀덱 쪽이 프레임이 훨씬 잘 나옵니다.

게다가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같은 좀 오래된 게임들의 경우 스팀덱에서는 해상도를 1080p 로 올려도 원활하게 플레이 가능했습니다. 20년전에 나온 포탈 조차 스팀덱에서는 FHD로 원활하게 플레이 가능했지만 맥북 에어에서는 프레임이 뚝뚝 끊겼습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는 CPU 아키텍처의 차이일겁니다. 리눅스 기반이라고 하더라도 x86 기반의 스팀덱과 ARM 기반의 애플 실리콘 맥북은 게임 성능에 있어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겠죠. 이런저런 사정을 다 고려하더라도 현재를 기준으로는 스팀덱 쪽이 맥북 에어보다 게임에 적합한 기기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스팀덱의 자체 성능은 4k 게임에는 부족하다보니 결국 TV에 연결해서는 스트리밍으로 주로 하게 되는데,문라이트나 스팀의 리모트 플레이 같은 스트리밍을 이용한 게임에 있어서도 스팀덱이 맥OS보다 훨씬 경험이 좋았습니다. 맥북에서는 스트리밍을 하는 과정 중에도 키보드가 필요한 과정이 꽤 있었지만 게임패드에 최적화된 스팀덱은 그냥 콘솔 하듯이 모든 과정을 키보드 없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컨트롤러의 정밀도, 응답속도도 맥OS나 iOS에서 스트리밍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했습니다.

결국 저는 애플 플랫폼에서 게임을 포기하고 스팀덱에 모든 게임을 외주화하였습니다. 애플 아케이드도 해지했죠. 고성능이 필요하지 않은 인디 게임이나 가벼운 게임은 스팀덱 자체에서 실행하고, 고성능이 필요한 AAA 게임은 스팀의 리모트 플레이를 통해 서재에 있는 데스크탑과 연동하여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게임이 스팀에 있기 때문에 스팀덱에 외주화가 가능했지만 아마도 개인마다 적합한 환경이 있을겁니다. 스위치나 플스 같은 게임 콘솔을 활용하시는 것도 방법이겠죠.

중요한건, 애플빠인 저조차도 애플 플랫폼에서의 게임 경험은 최악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플이 정말 게임에 관심이 있기라도 한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아마 애플이 게임에 정말로 진지했다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현금을 기반으로 게임 스튜디오 몇개 정도 인수하거나 적어도 애플 아케이드를 이 지경으로 방치하진 않았을겁니다. 결국 iOS 플랫폼의 기대작이었던 Monument Valley 3도 넷플릭스에게 뺐겼죠.

사실 이건 애플의 플랫폼 전략에 있어서 상당히 중대한 부분입니다. 애플의 경영진은 게임을 무시할지 모르지만 결국 앱 생태계와 하드웨어가 활성화되려면 게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게임이 있어야 새로운 하드웨어도 구매하고, 생태계도 활성화 됩니다. 초기 아이폰의 생태계 확장을 견인하고 아이폰을 교체하게 만들었던 것도 앵그리버드나 인피니티 블레이드 같은 게임 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앱스토어 수수료 갖고 장난치는 것보다는 구멍나버린 게임 생태계를 정상화 시키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애플은 이번 iOS18을 비롯한 새로운 운영체제에도 게임 모드 등의 점진적인 변화만 추가했습니다. 이번 운영체제에 추가된 기능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주긴 어려울겁니다.

애플이 게임에 좀 더 진지해지고, 뭔가 근본적인 방안을 도입하지 않는다면(스팀의 Proton 같은 호환성 계층이든..) 애플 플랫폼에서 게임 경험은 점점 최악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