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머신 사용자의 스팀덱(Steam Deck) 늦은 사용기 : 좋았던 점, 아쉬운 점, 주의할 점

결국 질렀습니다.

예전에 스팀머신을 사용했던 경험으로 밸브의 스팀 콘솔 생산 능력과 SteamOS에 어느정도 의구심이 있던 상태였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더 흥행하면서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스팀 20주년 세일도 겹쳤고 이마트에 재고가 있어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는 점도 컸습니다. 아마 배송을 기다려야 했으면 안 샀을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던 스팀덱이지만 한국에서는 무려 이마트에서도 팔 정도로 대중적인 성공을 이룬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특히 스팀 게임의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약한 걸보면 정발이 된 것만해도 신기한데 아직도 세일할 때마다 부지런히 품절되는거 보면 좀 신기합니다.

출시된지 오래된 기계고 여기저기 사용기가 넘쳐나는 기기이기 때문에 저는 좀 더 간단하게(?) 예전에 스팀머신을 사용했던 경험을 살려서 써봤습니다.


개봉기

스팀덱 패키지는 휴대용 게임기치고는 상당히 거대합니다. 들어있는 거의 대부분이 본체와 파우치라는 것도 황당하죠.

그 유명한 “할머니댁에서” 문구. 명절마다 외갓집 가서 뻘줌하게 핸드폰만 하고 있었던 경험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공감가는 문구입니다.

박스 내부에는 전원 어댑터와 이 파우치만 들어있습니다. 본체는 어디에?

본체는 이렇게 파우치안에 들어있습니다. 파우치 안에 본체를 넣어놓는 패키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체와 파우치를 같이 주는 부분에서 애플 제품을 십수년간 구매해온 사람으로서 웬지 모르게 감동했습니다.

파우치에는 손잡이가 두개 있는데, 이 파우치 뒷 부분에 있는 손잡이의 용도는 손잡이가 아니라 캐리어 손잡이에 끼우는 부분입니다. 스팀덱의 용도를 생각해보면 비행기 내에서 들고 다니기 간편하도록 만들어둔 것 같습니다. 많은 리뷰에서 이 부분의 용도 설명은 잘 안하더군요.

감동적인 SteamOS 부팅. 스팀덱에 있는 SteamOS는 3.0으로 제가 에일리언 웨어 기반의 스팀머신에서 썼던 SteamOS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빅픽처 인터페이스도 바뀌었고, 운영체제도 데비안 기반의 리눅스에서 아치 리눅스로 바뀌었습니다.

스팀덱은 하드웨어 적으로는 UMPC에 해당하지만 대부분의 사용자에게는 스팀 플랫폼을 위한 휴대용 게임 콘솔이라고 생각하시는게 좋습니다. 일반적인 UMPC와 달리 SteamOS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반적인 UMPC에서 윈도우 사용하듯 쓰기는 좀 어렵습니다.

리눅스 사용 경험이 있는 저조차 약간 낯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데스크탑 모드의 데스크탑 환경이 KDE 기반이라 GNOME 순혈주의자였던 저로서는 살짝 거부감(…)이 들었지만 KDE도 정말 많이 발전했습니다.

기본 브라우저는 다행히도 컹쿼러가 아니라 파이어폭스입니다. 아무리 리눅스라고 해도 유투브나 넷플릭스는 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크롬 설치 가능) 하지만 대부분 데스크탑 모드는 게임 모드에서 불가능한 설치나 Tweak, 패치를 설치하러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용기

스팀덱을 약 2주 정도 써봤습니다.

첫인상 & 좋았던 점

일단 스팀덱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들고 쓸만한데?” 였습니다. 스펙상의 크기와 무게는 스위치의 두배에 육박하지만 무게 분산을 잘해놓은 덕분인지 양 손으로 들으면 생각보다는 무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각보다 가벼운 느낌? 분명히 아이패드 프로 11인치가 더 가벼운데, 사용하는 자세 때문인지 들고 쓸만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위치보다 훨씬 큰 크기도 의외의 장점이었는데, 양 옆으로 넓은 구조다보니 자연스럽게 어깨 넓이로 들고 쓸 수 있어서 어깨가 접히는 느낌이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어린이나 여자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사이즈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기기의 컨셉은 휴대용 게임 콘솔이지만 PC 게임의 자유로움이 있어서 좋습니다. 밸브에서 직접 검증한 스팀덱에 최적화된 게임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최적화된 게임, 플레이 가능 게임들은 콘솔 게임처럼 별다른 세팅 없이 원활하게 실행됩니다.

PC 게임에서 하는 것처럼 사용자 모드나 한글 패치 같은 것들을 자유롭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에뮬레이터 설치도 제한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스팀에서 구매한 게임을 실행하기 때문에 스팀덱을 위한 게임을 추가로 구매할 필요도 없죠. 제가 스팀머신을 통해 다년간 이루고 싶었던 구성이 드디어 완성된 느낌입니다.

PSP 기반의 이니셜D도 플레이 가능(Emudeck 설치 필요)

스팀머신을 쓸 때와 비교해 상당히 높아진 SteamOS의 완성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온갖 제조사별로 파편화되어있었던 스팀머신 시절과 자체적으로 하드웨어를 만드는 지금은 다르겠지만, 스팀덱의 소프트웨어는 확실히 완성된 느낌이 듭니다.(물론 이런저런 버그가 아직도 있지만..)

Proton의 성능도 좋아져서 거의 웬만한 스팀 게임은 다 실행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기술적으로는 Proton이 Wine 기반이고 어쩌고 저쩌고.. 설명할게 많지만 그냥 설치하면 바로 실행이 가능합니다. Proton으로 실행된다는 느낌조차 전혀 없습니다.

아쉬웠던 점

하지만 역시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2세대를 기다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아무리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물리적인 무게와 크기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스위치도 번거로워서 잘 안들고 다니는데 스팀덱은 정말 마음을 먹어야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무게보다 크기가 더 문제였는데, 스팀덱 본체도 크지만 파우치는 그보다 더 크기 때문에 가방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엄청 큽니다. 가방이 크지 않다면 따로 손에 들고 다니는게 더 편할 것 같아요. 무게는 가방에 넣으면 아이패드 프로 정도라 그렇게 부담되진 않았습니다.

크기와 무게가 그렇게 큰데도 배터리 시간은 아쉽습니다. 스파이더맨 같은 현세대 AAA 급 게임들은 거의 1시간 30분 정도면 배터리를 모두 소모하는 느낌입니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버스나 비행기에서 절대로 버틸 수 없는 시간이죠. AAA 급 게임들은 돌아간다는데 의의가 있고, 실제로는 배터리 때문에 좀 더 간단한 게임이나 에뮬레이터 게임을 많이 하는 느낌입니다. 간단한 게임은 5시간도 가는 것 같습니다.

배터리 측면에서 한 세대 전 AAA 게임들을 실행하는게 만족스러웠습니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타이탄폴 2 같이 전 세대 AAA 급 게임들은 2시간 반 ~ 4시간 정도 지속됩니다. 스팀덱 자체에서 프레임을 30 프레임으로 설정하면 더 늘어납니다. 이 정도면 할만한 시간이죠.

주의할 점

딱히 아쉬운 점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좀 주의해야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다른 리뷰에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문제들입니다.

스팀 플랫폼을 위해 나온 기계니까 당연하겠지만 스팀 게임 외의 게임들을 실행하려면 조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윈도우를 설치할 수도 있겠지만, 성능과 배터리 측면에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팀 게임이 많지 않으면 다른 제품을 사는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특히 디아블로 같은 게임들..)

아무래도 리눅스 기반이라 그런지 하드웨어 호환성에 제약이 좀 있습니다. 리눅스 데스크탑으로 써보려고 집에 있는 LG 32UN880 모니터와 연결하니 디스플레이가 출력되지 않더군요. 찾아보니 LG 디스플레이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라 따로 해결 방법도 없는 것 같습니다. LG 모니터에 물려서 사용하시려는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LG TV에 연결은 잘 됩니다.)

저 같은 경우 가장 저렴한 64기가 모델을 구매해서 512기가 SD 카드로 용량을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게임 용량 측면에서는 SD 카드로 확장해도 충분할거라고 생각해서 한 결정인데, 실제로도 크게 문제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고용량의 AAA 게임들은 속도 때문에 쉐이더 캐시를 내장 메모리에 저장하는데 64기가 모델의 경우 AAA 게임을 많이 설치하면 이 공간이 금방 차버립니다. 그래서 SD 카드로 용량을 확장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장 용량은 큰 모델을 사거나 나중에 SSD를 교체해서 쓰시는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의 스팀덱

최근에 스팀덱과 유사한 게임용 UMPC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의아했습니다. 스마트폰과 아이패드 같은 휴대용 기기가 많은데 왜 추가로 게임용 기기를 들고 다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이런 기기들은 휴대하기에도 불편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스팀덱을 사용해보니 이런 모바일 기기의 홍수 속에서도 스팀덱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게임은 보통 조작이 중요한데,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은 정밀도에서 기존 게임 컨트롤러를 대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한 인앱 결제와 과도한 과금으로 가득 찬 스마트폰 게임 시장도 게임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스팀덱을 사용하면서 오랜만에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게임에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게임에 최적화된 컨트롤러와 추가 결제 없는 스팀 게임들은 게임에 몰입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스팀덱을 켜고 그냥 게임을 하면 됩니다.

스팀덱은 미러리스 카메라나 전자 잉크 기반의 ebook 단말기와 비슷한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자기 분야에서는 스마트폰보다 훨씬 뛰어난 기계들이죠. 누군가는 스마트폰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이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계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스팀덱을 게임이 아닌 다른 용도로 구입하려는 경우는 말리고 싶습니다. 물론 스팀덱은 리눅스 기반의 컴퓨터이지만 게임을 제외한다면 다른 범용적인 기기에 비해 단점도 명확합니다. 또한 윈도우를 설치해서 사용하는 것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스팀덱의 게임기로서의 정체성은 SteamOS가 완성시키는데, 윈도우를 설치하면 이 경험이 반감될 수 있습니다.

만약 윈도우 기반의 게임용 컴퓨터가 필요하다면 성능이 더 좋은 ROG Ally나 레노보의 리전 Go 같은 제품을 고려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팀덱은 이미 여러 컴퓨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휴대용으로 게임을 즐기기 위해 전용 게임 디바이스가 필요한 경우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맥북 사용자들말이죠.

마무리

지금까지 스팀덱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세팅을 시도해봤지만, 확실히 스팀덱이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로지텍 등에서 나온 클라우드 전용 게임기나 플레이스테이션 리모트 디바이스 등 유사한 여러 제품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히 스팀덱 같은 형태가 가장 완성형인 것 같습니다. 클라우드 게임이나 리모트 플레이는 스팀덱에서도 충분히 가능하고 말이죠.

다만 역시 쓰면 쓸수록 2세대를 기대하게 되는데 단점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게와 부피 때문에 밖에서 게임 한번 하려면 큰 마음을 먹고 꺼내야합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작아지기 위해서는 프로세서에서 큰 도약이 한번 더 있어야 하는데 밸브의 말에 의하면 후속 기기는 몇 년 이내에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랜만에 생긴 장난감이라 즐겁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망해버린) 스팀머신을 사용했던 사람으로서 발전한 스팀 게임 콘솔이 반가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스팀 머신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비해서 나온 티가 팍팍 난달까요. 아무리 오래걸려도 제대로 만들려고 하는 밸브 다운 기기입니다.(다만 세번째 기기는 안나오겠죠.)

하지만 역시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스마트폰과 스위치가 채우지 못하는 틈새를 매우기 위해 나온 물건이라, 딱 그 틈새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성능 PC 게임을 휴대해서 해야하거나 집 안에서도 다양한 장소에서 해야한다면, 그런 분들께는 스팀덱이 딱일 것 같습니다. 또한 맥북을 쓰고 있지만 게임을 하고 싶으신 분들께도 맥북과 같이 쓸 기계로 추천할만한 제품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