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이패드 프로가 필요없다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요즘은 예전에 비해 아이패드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해보기 위한 고군분투가 좀 줄어들었습니다. 일단은 요즘 퇴근 후 에너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게 가장 크고, 또 맥북과 윈도우 데스크탑 등도 적절하게 섞어서 쓰기로 수용하면서 아이패드로만 모든걸 해결해야한다는 강박 자체도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컴퓨터 생활은 아이패드 프로 중심입니다. 여전히 제가 대부분 수행하는 대부분의 작업은 아이패드 프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일부 고성능 작업(주로 게임), 맥에서만 해야하는 작업, 큰 화면이 필요한 작업이 아니라면 거의 아이패드 프로만 쓰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패드 프로를 플랫폼이 정한 한계 이상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앱 개발자들과 단축어의 힘이 큽니다. 아이패드 프로에서 파이썬을 실행해서 회사 업무를 자동화한다든지, 텍스트 에디터를 이용해 간단한 개발을 수행한다든지, 브라우저 개발자 도구를 활용해 CSS나 HTML 개발도 해보는 등 단축어와 여러 앱 덕분에 아이패드 프로는 애플이 정한 한계보다 그 이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iPadOS 26이 출시되면 그 한계는 더 줄어들겠죠.

근데 어제 아이패드 프로에서 uBlock Origin Lite를 설치해서 세팅하다보니 예전 P1510에서 우분투를 설치해서 세팅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우분투 때도 인터넷을 찾아가며 이런저런 세팅을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아이패드 프로에서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이패드 프로는 우분투 쓸 때와 난이도 자체가 다릅니다. 우분투 때는 컴퓨터 자체를 정상적으로 굴리게 하기 위한 삽질이었거든요. 하지만 둘 다 공식적인 해결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회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한다는건 동일했습니다. 같은 작업이어도 맥에서라면 포스팅조차 필요없는 일들을, 단지 아이패드 프로에서 한다면 시리즈 포스팅 거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문득 지금 기준에서 컴퓨터를 쓴다고 한다면, 아이패드가 더 쓰기 쉬울까, 맥이 더 쓰기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아이패드가 처음 나왔던 때만해도 아이패드의 컨셉은 “쉬운 컴퓨터”였는데, 지금도 그럴까요?

예전에는 맥도 윈도우에 비하면 만만치 않게 어려운 존재였지만 솔직히 요즘은 웹 지원도 잘되고 국내에서도 잘 지원되면서 예전보다는 정말 많이 나아졌습니다. 애플 실리콘 이후로 맥북을 쓰는 인구도 많이 늘어서 초기의 낯선 부분만 잘 극복한다면 아무리 윈도우를 오래 썼다고 해도 맥에 적응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이패드 쪽은 분명 맥보다 더 쉬운 컴퓨터가 맞습니다. 그냥 인터넷을 하고 유튜브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게임을 하고.. 아이폰과 동일한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어 어려울 게 전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한다고 해도 맥에서는 별도의 타블렛 장치가 필요하지만 아이패드에서는 그냥 화면에 대고 직접 그리면 끝입니다. 아이패드만큼 직관적인 컴퓨터도 많지 않을겁니다.

최근 MKBHD의 iPadOS26 리뷰 영상을 보면 중간에 슬랙으로 받은 PDF 문서에 사인을 해서 다시 슬랙으로 보내는 간단한 작업을 맥에서는 간단한데 아이패드에서는 상당히 많은 단계가 필요하다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패드에서의 작업이 대부분 이런식이라는거죠.

해당 장면은 6분 7초부터 보시면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문서에 싸인하는 작업은 아이패드 쪽이 훨씬 쉽습니다. 그냥 애플 펜슬로 싸인하면 끝이에요. 문제는 처음에 문서를 받고, 싸인을 한다음, 다시 어딘가로 보내야하는 워크플로우인데, 맥에서는 1) 바탕화면으로 파일을 받고, 2) 마우스로 싸인을 한 다음, 3) 슬랙에 첨부하면 됩니다. 아이패드 프로에서는 1) 슬랙으로 다운 받은 다음 2) PDF에서 “공유”를 눌러서 주석 처리 화면을 연다음 3) 애플 펜슬로 싸인을 하고, 4) 다시 “공유”를 눌러서 “복사”를 선택하고 5) 슬랙으로 돌아와 붙여넣기를 해서 보내야 합니다.

아이패드를 쓰는 매 순간이 이런 식입니다. 애초에 파일의 흐름부터 다시 생각해야하죠. 아이패드를 오랫동안 쓴 입장에서는 당연한 플로우인데, 아마 컴퓨터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사용 패턴일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로서 아이패드 프로에 기대하는건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가격만해도..) 그리고 그걸 아이패드 프로는 잘 못합니다. iPadOS 26으로 그 벽이 많이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꽤 많은 노력과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유튜브, 넷플릭스 머신이 되버리는거죠.

그래서 아이패드 프로는 맥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운 컴퓨터입니다. 그 자체가 맥보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맥과 윈도우의 사용성과 앱을 그대로 가져오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아이패드에서는 그거 그렇게 하면 안돼요.”라고 하면 “왜요?”라는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거죠.

지금 저 같은 경우는 위에 링크한 여러가지 노력을 통해 아이패드 프로로 컴퓨팅 생활의 95%는 커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5%는 맥과 윈도우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회사 업무를 할 때는 100% 윈도우 원격을 쓰고 있는 상황이구요(이건 보안 때문에 맥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일부 작업은 윈도우 컴퓨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2008년에 한창 우분투를 썼을 때랑 비슷하죠.(즉 그때랑 거의 비슷한 난이도라는거)

만약 누군가가 지금 대학에 입학하는데 컴퓨터를 하나만 써야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전 주저 없이 맥북 에어를 추천할 겁니다. 아이패드 프로로도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쓸데없는) 노력과 배경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이패드에서 작업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야말로 아이패드 프로를 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쓰고 있는 맥이나 별도의 데스크탑이 있다면 보조 장비로서 아이패드는 훌륭합니다. 10.9 ~ 11인치 모델은 휴대성도 좋고 작업성도 좋아서, 필요하면 원격으로 연결해서 작업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아이패드 에어만해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iPadOS 26이 출시를 앞두고 있는 지금, ‘이제 아이패드 프로가 맥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아이패드 프로를 사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속지마세요. 여러분에게는 아이패드 프로가 필요 없습니다. 맥북 에어를 사세요. 아니, 윈도우 노트북을 사세요. 굳이 삶에 고난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고난은 iPadOS 26이 나온다고 해결될 고난이 아니에요.

굳이 그 고난을 이겨내면서 까지 아이패드 프로가 사고 싶다면 아이패드 프로로 하려는 일들이 노트북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그게 적어도 세가지 정도 있다면 아이패드 프로를 사셔도 미디어 소비 머신으로 전락하지 않을겁니다.

덧. 그러는 너는 왜 아이패드 프로를 샀냐라고 한다면 저 같은 경우 첫 노트북이 태블릿 PC 였던 탓이 좀 컸던 것 같습니다. 폼팩터를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쓸 수 있는 태블릿 PC는 노트북이 대체할 수 없는 작업들이 분명 있거든요. 그러니 저는 이 고난을 취미로 즐기고 있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