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개봉한지 좀 오래된 영화인 <그린북>을 봤습니다. 포스터만 딱 봐도 미국식 인종간 갈등을 다루는 영화라는걸 알 수 있죠.
1960년대, 한 흑인 피아니스트(돈 설리 박사)가 미국 남부 순회 콘서트를 할 계획을 짭니다. 지금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나 싶지만 그게 1960년대라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켄터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등 미국 남부는 그때까지만해도 법적으로는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로드 매니저 겸 보디가드 역할로 백인인 토니 발레롱가를 고용합니다. 토니는 대도시인 뉴욕에 사는 나이트클럽 기도(?)로 한 주먹하는 인물입니다. 뉴욕에 살아서 좀 낫다지만 토니 역시 1960년대 미국의 평범한(?)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집에 일하러온 흑인들이 마신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죠. 다만 그도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백인 사이에서는 차별 받는 가난한 인물입니다.
토니는 피아니스트를 데리고 인종차별이 극심한 남부 지역 콘서트를 다녀와야 하는 일을 맡습니다. 음반사에서 그에게 책을 한권 주는데, 남부에서 흑인들이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한 가이드북인 <그린북>입니다. 흑인들이 머물러도 되는 숙소, 식당에 대한 안내 책자죠.(실제로 존재했다고 합니다.)
흑인 밑에서 일하게 된 백인이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으로 여행을 간다는 내용의, 두 남자가 만나서 자동차를 타고 미국을 여행하는 전형적인 로드 무비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만 들어도 결국 이들이 인종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우정을 나누게 될거라는 것은 쉽게 예상이 가능한 전개죠. 나름대로 무거운 주제지만 영화는 이를 가볍게 풀어갑니다.
돈 설리는 흑인 피아니스트하면 떠오르는 재즈 피아니스트 이미지(영화 시카고에 나왔던 피아니스트나, 디즈니 만화 소울에서 나왔던 피아니스트 등)와 달리 러시아에서 유학한 정통파 클래식 피아니스트입니다. 교양도 있고 교육 수준도 높아서 오히려 이게 흑인들 사이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요소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토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시트콤의 <프렌즈>가 떠오르는 전형적인 캐릭터입니다. 지저분하고 식탐도 강한데 따뜻하고 인정이 많으며 가족 간의 유대도 끈끈하죠. 토니는 돈에게 사람 사이의 정을 알려주고, 돈은 토니에게 교양을 알려주면서 서로 가까워집니다. 특히 돈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토니가 나타나 구해주죠.(애초에 해결사로 고용했으니)
영화는 돈 설리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가지 고초를 겪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당시 미국 남부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에 대해 분노하도록 만들어져있습니다. 그리고 토니를 통해 그런 것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시원하게 폭력으로 해결하기도 하는 전개가 주된 플롯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걸 보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음 그렇구나 정도. 실제 문제의 본질을 다루는 그런 무거운 영화는 애초에 아니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 사는 백인의 시혜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흑인들의 현실에 공감한다기보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백인이 남부의 백인들보고 촌놈들이라고 욕하는 느낌의 영화였어요.
이런 시혜적 느낌이 영화 후반부 흑인 다이너 바에서 돈이 재즈를 연주하는 흑인들과 같이 연주를 하는 장면에서 폭발하는데, 클래식 교육만 받았던 피아니스트가 즉흥으로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가는 둘째치고, 약간 “음, 송충이가 갈잎을 먹고 싶은 사정은 잘 이해해. 하지만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왜냐면 재즈를 연주하는 돈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정말 즐거워보였거든요.(물론 실존 인물인 돈 설리는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래서 누구나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인종 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냥 평범한 로드 무비이고 따뜻한 내용이거든요. 이 영화가 사실에 기반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죠.
실제로 돈 설리는 흑인 사회에서 외톨이도 아니었고(오히려 흑인 운동에 앞장섰다고 함), 토니와 실제로 남부 여행 당시 일을 했던 것은 맞지만 단순 고용인일 뿐 막역한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는 여러가지 영화 외적인 이야기들이 있긴 하지만(실화였음을 이야기하는 영화 크레딧에서도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끝까지 안나옵니다.), 영화 시작에서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음’ 이라고 말한 것처럼 실화에 바탕을 둔 허구라고 보면 마음이 편합니다.
혹시 영화가 흑인 인권에 대한 진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분들이나 이런 류의 미국식 로드무비를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할만합니다. 할리우드식 가족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볼만할 것 같아요. 다만 진지한 인종 간 문제를 다루는 영화이길 바랐다면.. 아마.. 화가 나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