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ON과 Xnote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

한때 나는 LG전자의 제품을 좋아했다. 성능은 좋지만 특색과 개성이 별로 없는 제품을 만들던 삼성의 제품과는 달리 LG의 제품은 특색이 있고 컨셉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결과 10년 넘게 나는 LG의 CYON 피쳐폰을 써왔고, 10년 넘게 지인과 가족들에게 Xnote 노트북을 추천해왔다.(후지쯔 노트북을 쓰고 있는 관계로 정작 본인은 노트북을 사지 못했다.)

지금 나는 핸드폰은 노키아의 스마트폰을 거쳐 아이폰을 사용 중이고, 노트북은 맥북을 쓰고 있다. 나는 더이상 LG의 제품을 지인과 가족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그건 그동안 그들이 만든 제품이 나를 지속적으로 배신해왔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그동안 겪어왔던 LG 제품들의 배신 일지다.(LG 직원이시거나 LG의 팬이라면 뒤로가기를 눌러도 좋다.)

  1. 내가 가장 처음 썼던 핸드폰은 CYON에서 만든 플립폰이었다. 흑백 디스플레이에 간단한 기능만 갖고 있는 전화기였지만 당대의 같은 제품들에 비해 꽤 좋은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전화기는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부서져 망가져버렸다.

  2. 그 다음에 썼던 핸드폰은 CYON의 폴더폰이었다. 최초로 칼라 디스플레이를 탑재하고 있던 제품이었지만 상당히 두꺼웠고 성능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벨소리도 단음! 액정 부분의 커넥터가 자주 망가지는 제품이었다. 결국 수리 센터만 3번 넘게 방문하고 끝났던 제품이었다.

  3. 블루투스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고 한창 빠져있던 시절 나도 CYON의 블루투스 폰을 샀던 기억이 난다. KF1100이라는 모델이었는데 이 전화기는 무려 블루투스를 달고 있으면서 블루투스로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통화만 가능했다) LG에 문의해보니 의도적으로 A2DP 프로필을 뺐다는 답변을 받았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제품 컨셉상이라나. 소프트웨어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가격 차별과 제품 차별에 의한 의도적 기능 축소였다. 나는 여기에서 LG가 단일 제품을 제대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4. 그 다음 내가 샀던 폰은 디스코라고 불리는 터치스크린과 키패드가 달려있는 하이브리드 형태의 제품이었다. 터치스크린의 장점과 입력의 편의를 살릴 수 있는 꽤 괜찮은 컨셉이었다. 이번엔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 블루투스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최소한 블루투스에 있어서는 기능 제한이 없었다. 최소한 이 폰은 당대 CYON 브랜드에서 플래그쉽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배신이 없을 것이라 믿었다.

  5. 생각해보면 디스크폰이 내 CYON 사랑을 끝낸 결정적인 물건이었다. 이 제품은 당대 CYON의 플래그십 제품이었지만 사용상 문제가 많았다. 일단 키패드 설계의 문제였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제품은 종료 버튼과 통화 버튼이 저 좁은 키패드 부분에 다 들어가 있다. 문자를 키패드로 입력하다보면 종료버튼을 잘못 눌러 문자를 날리기 일쑤였다. 문자를 날릴 때에 대비한 UI 상의 방어 장치(Alert이라든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6.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뿐 아니었다. 이 핸드폰은 터치스크린을 갖고 있는 제품이었는데 키패드를 달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는지 키패드 전용 Wipi를 탑재하고 있었다. 그 결과 게임이나 인터넷 같은 것은 터치스크린을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키패드로만 사용해야했다. 게다가 키패드용 게임과 인터넷 브라우저가 설치되기 땜에 그 넓은 화면을 다 사용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 제품은 블루투스로 음악을 듣는 것이 가능하긴 했지만, 음악 플레이어를 나가면 음악이 종료되었다. 한마디로 사용성 고려를 전혀 하지 않은 쓸모 없는 기능이었다.

  7. 가장 참을 수 없었던건 해외 버전과의 차별이었다. 해외 버전에서 이 제품은 Wifi가 있었다. 내장된 브라우저도 있었다. 하지만 국내 버전에서는 국내 통신 환경의 특성과 DMB 탑재를 이유로 모두 빠졌다. 같은 해에 출시된 경쟁작인 노키아 5800과 비교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제품이었다. 제대로된 사용성 설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컨셉만 살아있는 제품이었다. 이때부터 LG에서 만든 제품에 대해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핸드폰 뿐 아니었다. LG의 배신은 노트북에서도 계속 되었다.

  1. 핸드폰에서는 구매하는 것마다 물을 먹고 있었지만 어쩐지 노트북에서는 Xnote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살아있었다. 그런 이유로 여자친구님에게 P300이라는 노트북을 추천했다. 이 노트북은 빠른 CPU와 빠른 GPU를 갖고 있는 꽤 괜찮은 성능의 모델이었다. 디자인 또한 특징 있는 컨셉이 매력적이었다.
  2. 하지만 이 노트북은 핸드폰과 마찬가지로 기본기가 매우 부족했다. 기본적으로 GPU 과열로 인해 시스템이 불안정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윈도7로 업그레이드하려고 하니 BIOS 호환성 문제가 발생했다. USB 장치를 꽂을 때 작은 쇼트가 발생해도 시스템 자체가 나가버리는 문제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한 겨울에도 방열판 없이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문제는 제품 사양서나 제품 리뷰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LG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아무 대응이 없었다.

  3. 그 다음 나는 아버지에게 X300이라는 노트북을 추천했다. 이 노트북은 맥북 에어 수준의 두께와 훨씬 가벼운 무게가 특징인 노트북이었다. 맥북 에어가 봉투에서 나오는 광고를 정면으로 패러디한 광고나 신민아가 창문에 스카치 테이프로 노트북을 붙여놓고 프리젠테이션 하는 광고로 유명했다.

  4. 이 제품에 대해 한가지 불확실했던건 아톰CPU를 사용했다는건데 이 제품의 리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블로거들은 조금 느리긴 하지만 저전력인데다, 팬(FAN)이 없는 것에 대한 Trade-off로서 충분히 감수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나는 블로거들을 믿었다.

  5. 이 비싼 쓰레기는 아버지에게 퇴출당하고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다.(“사용"이라기보다 구석에 전시되어있다) 이 물건의 가격은 160만원이었다. 같은해 출시된 2010 맥북 에어 고급형보다도 훨씬 비싼 물건이었다. 당시에는 맥북이 비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이 쓰레기보다 비쌌을까.

  6. 이 쓰레기가 갖고 있는 아톰 CPU와 GMA500 GPU는 게임은 사치이고 인터넷이나 단일 문서 작업도 못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윈도7에서는 비교적 최적화가 되어있었지만, 최적화 범위를 벗어나는 동영상이나 웹 페이지에서는 심하게 버벅거렸다. 거의 아무것도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7. 무엇보다 재밌는건 배터리 사용 시간 부분인데, LG에서 광고하거나 블로거들이 써놓은 배터리 연속 사용 시간은 3시간이었다. 근데 나는 아무리 테스트해도 배터리가 3시간이상 연속으로 간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세시간이라는 시간은 배터리 탈착하여 배터리 두개를 사용할 때의 시간이고, 배터리 하나의 연속 사용 시간은 1시간 반짜리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배터리 시간 표기를 이렇게 하나?

디스코폰과 노키아 5800은 같은 해에 출시된 제품이다.(2008년) 내가 기억하기에 노키아 5800은 하드웨어에서 지원하지 못하는 것 빼고는 거의 모든게 가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제한도 없었고 사용상 넌센스와 같은 문제도 없었다. 지금도 많이 그리워하고 있는 폰이다.

비싼 쓰레기 x300과 맥북 에어 2세대(2010)도 같은 해에 출시된 제품이다.(2010년) 맥북 에어 기본형은 x300보다 몇배나 좋은 CPU를 달고 있었지만 두께와 무게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디자인을 위한 Trade-Off라고 보기엔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

왜 같은 시대에 나온 해외의 제품과 LG의 제품은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났을까? 유독 LG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본다.

  1. 일단 이해할 수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국내 IT법규가 있을 것이다. WIPI 탑재 강제는 소프트웨어 경쟁력 감소의 1등 공신이었다. 아이폰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현실적인 게임등급제가 그중 하나다.
  2. 또 하나는 국내 기업에 가장 아쉬운 부분인데, 디자인 변화와 컨셉, 마케팅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맥북 에어는 디자인의 변화가 한번도 없었고, 노키아의 제품도 마찬가지였다. 해외의 제품이 기존의 제품을 +1 씩 "개선"을 더해가는 느낌이라면, 우리의 제품은 신제품이 나오면 0부터 다시 설계한다. 기존 제품이 갖고 있던 장점은 다 무시하고 새로운 컨셉의 제품을 신제품이라고 만들어 놓으니 디자인 정체성이 훼손되고, 호환성도 떨어져서 사후 지원이라는게 아예 없어진다. 아이폰이라면 특유의 디자인이 떠오르지만, CYON이나 애니콜하면 떠오르는 디자인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나마 지금은 삼성은 갤럭시로 정체성을 확립했고, LG도 G 브랜드를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는게 다행이랄까.

  3. 사실 실무자들이 그렇게 만들기 싫어도 위에서 의사 결정을 하는 경영자들에겐 그런 전략이 먹힌다. 정체성보다 당장의 판매량이 중요하고, 제품의 품질보다 매출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제조사 중 제품에 대한 철학이 있는 경영자가 경영하는 기업은 단 한개도 없다고 본다.

그럼 지금은 비슷한 현상이 없을까? 사실 이렇게 길게 LG에 대한 안좋은 추억을 늘어놓고 있는 이유도 바로 두가지 제품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LG의 그램(Gram)이라는 노트북이었고, 또 하나는 와인스마트(Wine Smart)라는 제품이다.

그램은 맥북에어의 경쟁작이다. 맥북 에어보다 액정도 좋고 가볍다. 같은 크기 내에서 액정도 넓다. 게다가 1kg도 안되는 무게를 갖고 있는게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맥북 에어 11인치의 배터리 시간이 실사용 기준 약 7시간 정도 가는데 반해 그램은 두시간 반 정도 밖에 가지 않는다. 무게 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데 왜?

인텔에서 하스웰이라는 저전력 CPU를 만들자, 애플은 맥북 에어의 디자인을 변경하지 않고 배터리 시간을 늘리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LG를 비롯한 국내 노트북 제조사는 사용 시간을 유지하고 제품의 두께와 무게를 줄여버렸다. 디자인을 좀 더 얇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 배터리 시간을 늘리는 것보다 더 신제품 같다는 느낌이 들고 더 잘팔리기 때문이다.

와인 스마트도 마찬가지. 카톡을 주로 사용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폴더 폰이라는 디자인을 되살렸다. 키패드로 입력도 된다. 언뜻 보기엔 꽤 괜찮다. 하지만 이 폰은 기본적으로 안드로이드를 달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터치스크린 기반의 운영체제다. LG가 모든 부분에서 키패드를 사용하도록 UI를 재설계했다면 모르겠지만 이 제품에 터치스크린이 달려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아보인다. 만약 터치스크린을 사용한다면 폴더폰은 최악의 디자인이다. 난 이 제품이 타겟 대상층을 위해 얼마나 사용성 고려가 되어있는건지 의심이 든다.

결국 내가 보기에 현재도 변한건 없어보인다. 컨셉과 디자인은 존재하지만 사용성은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건 좋아보이지만 실제 사용하면서 느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다. 이런 부분은 심지어 구글 브랜드로 출시되는 넥서스의 하드웨어에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빗대어 LG에 대한 비난들을 했지만, 사실 이건 다른 국내 제품에서 쉽게 발견되는 특징이다.(삼성은 그나마 제일 낫다) 스티브 잡스 수준은 아니더라도 제품에 대한 애정과 철학이 있는 경영자가 있는 기업이 성장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진정 불가능한걸까?

그리고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나는 LG에 취직하는 길은 막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