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장송의 프리렌을 이제야 봤습니다. 원래는 블랙미러 시즌 7을 보려고 했는데 요즘은 정치도 그렇고 AI도 그렇고 블랙미러가 현실을 못 따라가는 수준이라 영 재미 없더군요. 안그래도 암울한 세상에 암울한걸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아예 힐링물로 장르를 틀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게 SSSS. Gridman이었던가.. 어느 순간부터 극장판을 제외하고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은 잘 안보게 됐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일본 만화에 대한 집안 분위기, 주변 시선 때문에 스스로도 멀리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엔 주변의 시선이든 뭐든 그냥 보고 싶은걸 보겠다! 라고 끝까지 봤습니다.
<장송의 프리렌>은 일본식 RPG를 많이 했던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일본 판타지 설정의 애니메이션입니다. 요즘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도 전통적인 판타지 장르를 이리저리 비트는 전개가 유행인데, 이 작품은 너무도 전통적인 클리셰를 따라갑니다. “용사가 마왕을 잡으러 모험을 떠난다”는 전개 말이죠.
대신 시간을 비틀어서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1화부터 용사 일행이 마왕을 쓰러뜨리고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에서 최종 보스인 마왕은 이미 죽고 없습니다. 용사 일행이 마왕을 쓰러뜨리고 난 이후의 이야기죠.
프리렌은 용사 일행의 마법사로 장수하는 엘프입니다. 마왕을 잡은 뒤 (엘프에겐 찰나의 시간인) 50년이 지나 용사를 다시 찾았을 때 용사는 이미 노인이 되어있었죠. 이후 용사는 노환으로 죽고, 프리렌은 용사의 장례식에서 후회하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50년 동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정작 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구나.”
전체적으로 프리렌이 인간에 대해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 용사에 대해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마왕이 죽고 난 다음의 이야기이므로 전개 자체가 평화롭습니다. 물론 중간에 마왕의 잔당도 나오긴 하지만 마왕을 쓰러뜨린 프리렌 자체가 이미 전설적인 마법사라 큰 어려움 없이 이겨내죠. 용사들이 모험을 끝내고, 그 동료가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의 발자취를 다시 되짚어간다는 이야기 자체가 매력적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도 그렇고, 회상을 통해 등장하는 용사 힘멜의 여러가지 이야기도 그렇고, 판타지물이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는 힐링물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분명 초반은 프리렌이 여정을 떠나는 힐링물이었는데 중후반부 쯤 가니 갑자기 능력자 배틀물이 되버리는 요상한 전개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재밌게 봤습니다. 이렇게 RPG의 공식을 잘 지키는 작품도 오랜만이었네요.(이런 전개를 마지막으로 본게 마법진 구루구루였던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용사 일행이 자꾸 시시한 일을 도맡아 하자, 일행 중 한명이 “우리는 지금 이런 시시한 여행을 할 때가 아니다”라고 지적하자, 용사가 그에 대해 대답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럼 아이젠(일행의 이름)은 고달프고 피곤한 여행을 하고 싶은거야? 나는 이런 시시한 여행이 즐겁다고 생각해.”
그 일행은 나중에 돌이켜보니 정말 시시해서 정말 즐거웠던 여행이었다고 회상하죠. 어쩌면 삶이란 것도 시시할 수록 즐겁고 행복한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덧. 장수하는 엘프의 특성을 이용해 재밌는 장면도 많이 나옵니다. 마왕과의 전투 당시에는 고전했던 마족 마법사를 봉인해놨다가 80년 후에 다시 가서 처치하는데, 이미 그 시간동안 해당 마족의 마법은 널리 연구되고 알려져서 예전에 강했던 마법이 지금은 그냥 일반 방어 마법으로도 막히는 마법이 되어버립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