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밀리의 서재에서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보았습니다. 한창 유행했던 책인데 이제야 봤습니다. -_- 책에 대해서 아무 정보 없이 봤을 때는 해당 제목의 장편 소설인줄 알았는데 여러 단편소설을 묶은 단편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단편 소설을 좋아해서(넷플릭스도 시리즈보다 옴니버스 좋아함) 나름 재밌게 봤습니다.

그러고보면 SF를 소설로 읽은건 이 책이 처음이었습니다. 나름 이런저런 소설 많이 보긴 했는데 대부분 판타지 소설 위주였고 아니면 그냥 교과서 같은데 나올만한 읽어야해서 읽은 소설 밖에 없었네요.

단편 소설 대부분 우주과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SF라는게 무릇 과학적 디테일은 “그렇다치고 넘어가는 사실”들이 많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이론도 꽤 꼼꼼하게 설명을 하고 지나갑니다. 문제는 제가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거지만..-_- 생각보다 디테일해서 알고보니 작가가 생화학 분야 석사 출신이라고 합니다.

각 단편이 특색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좋았습니다. 뭔가 깔끔하게 써진 느낌이 좋았습니다. 주제도 선명하고 소설에 나오는 과학적 허구도 흥미로웠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저 두개가 가장 과학적 사실이 단순했던 것 같네요. 그냥 이해가 쉬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공생가설>은 다른 우주에서 온 미지의 지성체들이 인간과 공생하며 신생아 시절부터 이타심과 협동심 같은 것에 대해 알려주고 7살이 되었을 때 홀연히 어디로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외계인에 대한 여러 창작물 중 이런 이야기는 처음 본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이것도 과학적인 이야기 파트에서는 몇 번 잘 뻔 했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이 소설책의 표제이기도 한데, 가장 잘 써진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날 블로그에 조금씩이라도 글 쓰다보니 잘 써진 글과 어렵게 써진 글을 어느정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명하게 잘 써진 소설이었습니다.

처음 제목만 들었을 때는 신카이 마코토 식 연애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별의 목소리> 같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막상 내용은 전혀 다르게, 100년 넘게 우주 정거장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우주 항법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먼 우주로 가는 우주 노선이 점차 사라지게 된 세상에서 수만 광년 떨어진 행성에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찰나의 실수로 마지막 우주선을 타지 못해 100년 동안 가족과 떨어지게 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할머니는 폐쇄된 우주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며 이렇게 묻습니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공생가설>이 인간성이 어떻게 발달하는 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했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넓은 우주 공간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담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둘 다 재밌게 봤습니다.

전반적으로 SF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과 여성, 장애인, 약자에 대한 연대가 묻어있는 사회적인 소설입니다. 특히 여성 주인공이 많이 나오고 하나 같이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좀비물이 좀비를 빌려서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처럼(<눈먼자들의 도시>, <워킹데드> 등) 이 소설도 SF를 빌려와서 마치 남 이야기 하듯 하지만 결국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태도, 여성에 대한 차별 등 여러 메시지가 진하게 깔려있습니다.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같은 책 후반부의 세가지 소설이 특히 그런 경향이 좀 두드러지는 편이었습니다.

좋은 소설이었지만, 살짝 아쉬운건 메시지가 약간 두드러지는 느낌이랄까요. 몇몇 소설은 내용이나 SF 자체보다 메시지가 더 중요한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들었습니다. 좋은 메시지인데 그걸 더 강조하다보니 약간 잔소리 같이 느껴지는 그런 느낌.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자신의 직업에서 최선을 다한다는거(?)였습니다. 과학자는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고, 언어학자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외계인과 소통하려 하고, 우주인도 최선을 다해서 훈련에 임합니다. 뭐 SF니까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직업인이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어요. 사람이 아니라 직업적인 의미의 도구 같달까..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약간 납작해지는 느낌이 좀 아쉬웠습니다. 심지어 위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할머니조차 충실한 직업인이었습니다. 차라리 <스펙트럼>의 외계인 ‘루이’가 더 인간적인 느낌이었죠.

어쨌든 오랜만에 본 소설이었고, 처음으로 본 SF였는데 좋은 책이었습니다. 다만 쉴 때 읽으려고 했던 책인데 이해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을 이해하려하는데 머리를 너무 써서(…) 다음에는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을 찾아봐야 겠습니다.

덧. 글 쓰고 발행하기 전에 태그를 입력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블로그에서 책에 대한 리뷰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군요. 아래 관련 글을 보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몇번 했지만 리뷰 형식으로 이야기한 건 이번 글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