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과 라이트닝이 지구에게 지은 죄

이번에 집을 대청소할 일이 생겨서 집에 있는 오래된 전자 기기와 충전기, 케이블을 대거 정리했습니다. 집에 쓸데 없이 쌓여있는 애플 기기 박스들도 지금 쓰고 있는 기기 박스 외에는 다 같이 정리했습니다.

정리하다보니 특히 라이트닝 케이블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예전 아이폰 사면서 들어있던 케이블, 만약을 위해 사두었던 케이블, 오래된 박스에서 꺼내지 않은 케이블 등 여러 곳에서 쓰지 않은 라이트닝 케이블이 정말 많이 나오더군요.

아이폰5를 쓰던 시절만해도 라이트닝 케이블이 내구성도 안좋고 귀해서 기회가 되면 쟁여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습관이 아직도 이어진게 화근이었습니다. 게다가 라이트닝 케이블 내구성도 많이 좋아져서 웬만해서는 오래 쓰다보니 결국 안쓴 케이블만 무더기로 많아진거죠.

문제는 저는 이제 라이트닝 케이블을 안쓴다는 겁니다. 아이폰 중 최초로 USB-C로 넘어갔던 아이폰 15 프로를 쓰고 있고, 아이패드 프로를 쓰고 있고, 심지어 에어팟도 USB-C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애플 생태계에서도 이젠 웬만하면 라이트닝 케이블을 쓸 일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결국 집에 있는 모든 라이트닝 케이블은 정리 대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정말 쓸 일 없는 케이블이 된거죠. 그 많은 라이트닝 케이블을 쓰레기 봉투에 넣으면서 내가 이걸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탄소 발자국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애플이 24pin 커넥터를 라이트닝으로 바꿨던 10년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던 일입니다. 표준이라는건 바뀌기 마련이기 때문에 라이트닝이 USB-C로 바뀐거 자체는 문제될 일이 아니고 오히려 환영할 일이죠.

문제는 USB-C가 표준이 된지 오래였던 상황에서도 꿋꿋이 라이트닝 출시로부터 10년을 꽉꽉 채워서 라이트닝을 끝까지 밀었던 애플입니다. 애플은 USB-C를 누구보다 빨리 도입했음에도(맥북에) 아이폰에는 아이폰15가 나올 때까지 라이트닝 포트를 탑재하고 라이트닝 케이블을 박스에 계속 동봉하는 중죄를 저질렀죠. 액세서리 호환성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라이트닝을 유지했습니다.

애플은 친환경을 위해 충전기를 박스에 동봉하지 않는 (나쁜) 트렌드를 선도한 회사입니다. 환경을 누구보다 생각하는 애플이라면 좀 더 표준에 가까운 USB-C 케이블로 좀 더 빨리 갈아타서 케이블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텐데, 오늘 버리는 이 수 많은 라이트닝 케이블을 보면 이게 과연 정말 친환경인지 의심됩니다.

지금이라도 모든 애플 제품이 USB-C를 쓰게 되면서 케이블의 범용성이 높아진건 다행입니다. 물론 아직도 USB-C 케이블이 동봉되지만, 다른데도 못 쓰고 앞으로도 못 쓸 라이트닝이랑은 다르니까요. 요즘은 qi 규격, 맥세이프 규격의 무선 충전도 괜찮아서 앞으로는 케이블을 좀 더 줄일 수 있게 되겠죠.(물론 무선은 또 다른 쓰레기를 낳을 위험도 있지만요)

덧. 이번에 버린 것 중에는 충전기도 많았습니다. 충전기는 언젠가 쓸 일이 있어서 웬만하면 잘 안버리는데 아무래도 요즘 시대에는 5w 규격의 저용량 충전기는 영 쓸 일이 없어서 결국 버리게 되더군요. 케이블과 어댑터가 일체형으로 되어있는 충전기도 범용성이 없어서 결국 다 버렸습니다.

애플이 구성품을 줄이는건 얄밉지만 이런걸 생각해보면 기본 구성품을 줄이는게 친환경이라는 애플의 주장도 어느정도 일리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낀 구성품 비용과 운송 비용을 토대로 가격도 내리면 참 좋을텐데요.

덧2. 이번에 버린 것 중 가장 애매했던건 애플워치 충전 케이블이었습니다. 애플워치 충전 케이블은 버리기엔 앞으로 쓸 일도 있어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연결 부분이 USB-A 였습니다. 집에 USB-A를 쓰는 컴퓨터가 아이맥(2017) 밖에 없어서 이것도 활용처가 좀 애매하더군요. 게다가 USB-A 애플워치 케이블은 충전기도 꽤 가리는 편이라 용처가 애매해 이것도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