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플러스에서 시크릿 인베이전을 봤습니다. 보통 드라마를 볼 땐 장기적으로 볼 생각에 마음을 먹고 보지만 시크릿 인베이전은 총 6화 구성으로 드라마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차라리 영화처럼 볼 수 있을만한 길이였던 것 같습니다.
엔드 게임에서 터뜨린 이후로 MCU도 슬슬 소재도 고갈되고 있고 힘도 빠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스파이더맨 같은 힘 있는 프랜차이즈가 있긴 하지만 최근에 개봉했던 MCU 계열 영화들은 하나 같이 다 별로였거든요. 드라마도 완다비전 이후로 MCU 드라마는 재밌게 본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시크릿 인베이전은 마블의 주요 인물 중 닉 퓨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로, 닉 퓨리는 초능력이 없는 스파이입니다. 화려한 액션으로 승부하는 블랙 위도우와 달리 신체 능력도 작중에서 특별하게 묘사된 적은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만큼 이 드라마도 다른 MCU 계열 영화나 드라마에 비교해보면 스파이 물이나 정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장르적으로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 가깝습니다.
이 드라마는 보기 전에 반드시 <어벤저스 : 엔드 게임>과 <캡틴 마블>을 봐야합니다. 최소한 하나를 봐야한다면 <캡틴 마블>은 반드시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닉 퓨리의 행보가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이 많습니다.
<시크릿 인베이전>은 캡틴 마블에 나왔던 스크럴이라는 외계 종족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스크럴은 얼굴과 몸을 의태하여 특정 인물을 똑같이 흉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종족으로 캡틴 마블에서도 주요 정부 기관에 숨어 있는 스파이로 활동하는 모습으로 비춰지죠. <시크릿 인베이전>도 제목처럼 스크럴 들이 지구 곳곳에 침투하여 지구를 위협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원작 코믹스랑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다만 MCU에서 스크럴은 크리라는 전투 종족과 오랜 전쟁 끝에 고향 행성에서 쫓겨나 지구에 숨어들어온 난민입니다. 대부분은 우호적이지만 일부 과격 세력이 각 나라의 정치 지도자나 테러리스트로 위장하여 지구에 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 국지적인 테러나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걸 보고 있으면 지구 상에서 인간이 벌이는 비효율 적인 전쟁이나 이해할 수 없는 테러 행위 들이 사실은 스크럴 같은 존재가 일으키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현실에는 스크럴이 없으니 그건 그냥 우리의 희망사항이겠죠.
스크럴은 자유롭게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렙틸리언 음모론이 떠오르기도 하고, 스크럴이 갖고 있는 난민이라는 지위 때문에 현실의 난민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고향에서 쫓겨 난 이후 여러 나라에 흩어져있지만 결국 종족의 이익을 위해 협동하고 언론과 국가를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유태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작중 스크럴은 끊임없이 미국과 러시아가 핵전쟁을 일으키도록 공작하는데 이는 현실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미국이 러시아와 최대한 직접적인 충돌은 자제하려하는 모습이 비치죠. 여러모로 현실의 여러가지 사정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극중에 스크럴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비난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재밌게도 스크럴들도 하는 짓이 인간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과격파의 테러리즘부터 시작해서 온건파를 쫓아내고 인간을 모두 말살하고 지구를 차지하자는 급진파를 자신들의 리더로 세우는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현실의 여러가지 문제를 스크럴의 입을 통해서 비판하고 풍자하는 느낌도 있는데, 다만 깊이가 깊진 않아서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봤습니다. MCU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는 없고 시종일관 무겁고 정치적이지만 MCU 특유의 분위기가 물려가고 있던 차여서 오히려 조금 신선했습니다. 같은 회사의 또 다른 프랜차이즈에서 비슷하게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 <안도르>와 많이 비교되는데, <안도르>는 아직 못 봐서 비교가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윈터솔져 같은 장르를 재밌게 보셨다면 <시크릿 인베이전>도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파이 액션이라기보다는 대화나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도 볼만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뭐하나 빠지는게 없을 정도라서 특히 사무엘 잭슨을 좋아하신다면 MCU의 팬이 아니어도 한 번쯤은 볼만한 것 같습니다.
다만 용두사미의 이야기 전개는 좀 많이 아쉬웠습니다. 뭔가 거대하고 치밀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았던 스크럴들은 닉 퓨리가 뭐 별 다른거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멸하기 시작하고 5화에서 6화 쯤 되면 갑자기 이야기가 급 마무리됩니다. 뭔가 잔뜩 기대하게 했지만 드라마 전체가 짧아서 장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었죠.
게다가 어벤저스 등에서는 항상 몇 수 앞서서 대비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닉 퓨리가 여기에서는 뭔가 좀 엉성합니다. 물론 MCU의 주인공으로서 인간적인 허점과 그로인한 갈등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그려져야 하기 때문에 닉 퓨리도 뭔가 성장하는 캐릭터로 나와야했겠지만, 그래도 다른 시리즈의 닉 퓨리를 생각하면 좀 답답합니다.
MCU 특유의 분위기가 좀 지겨워졌거나, 닉 퓨리와 사무엘 잭슨을 좋아하시는 분들, 그리고 저처럼 정치 스릴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러닝 타임도 길지 않으니 한번쯤은 보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덧. 스크럴들은 서로 변신하면 같은 종족인지 구분할 수 있는걸까요? 작중에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탈로스는 “자유자재로 변신 가능한 능력”을 이용해 얼마든지 스크럴 내부에서 교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또 스크럴은 다른 스크럴로도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 이용해 얼마든지 반대자를 제거하거나 반란을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