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IT 회사 취업 이야기 – (2)

드디어 대망의 첫 출근일! 부푼 꿈을 안고 출근한 회사에서 첫날은 놀았습니다. -_- 그 이유인 즉슨 제가 일하게 되는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사장님 뿐이었고, 제가 소속되어있다는 기획팀에서는 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사장님이 앞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일에 대해서도 아무도 모르더군요. 그런데 정작 사장님은 파견 근무지에 가계시고..-_- 그렇게 첫날은 일 없이 그렇다고 온전히 놀지도 못한채 그렇게 보냈습니다.그때 놀면서 여러가지 문서를 보았는데 그 중에 좀 흥미로웠던 것은 “기획자의 하루”라고 써있는 문서였습니다. 기획자의 하루 일과 같은 것을 써놓은 문서였는데요, 대부분의 업무가 고객 전화 응대였습니다. 상담 역할부터 고객과 일정 조율, 전화 영업까지. 아마 대부분의 영세한 웹 에이젼시(지금 살아남아 있는 곳도 얼마 안되겠지만..)의 기획자는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일을 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화면 기획도 하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정해진 룰에 따라 그대로 하는 일이었기에.. 기획자 업무 중 정작 기획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죠-_-;)어쨌든 그렇게 첫날을 보내면서 그날부터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들어와서 하는 일이 이런건 아닐꺼야..라며 되뇌이며 사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기다려보자 싶었습니다.그리고 둘째 날, 갑자기 컴퓨터를 싸들고 다른 곳으로 가랍니다-_- 당시 그 회사는 모 공공기관의 프로젝트를 발주 받아서 일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게 된 것이죠. 입사 이틀만에 그렇게 저는 파견지에 나가 일하게 되었습니다.제가 파견된 프로젝트는 앞으로 회사의 근간을 좌우할 나름(?) 중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사장님도 파견지에서 일하고 계셨던 것이죠. 이미 프로젝트는 4개월 정도 진행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 프로젝트는 좀 이상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퍼블리셔, 디자이너, 개발자들이 각각 있었는데 기획자는 없었습니다. PM도 없었습니다. -_-;; 사장님이 PM 역할을 하셔야 했지만 사실 사장님은 공공기관 관계자들과 협상(?)하고 포장(?)하는 역할이었죠. 그리고 더 당황했던건 모두가 와서 일을 하는게 아니라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_-;;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나 혹은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입사한지 이틀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_- 둘째날도 결국 놀았습니다. 다만 한가지 좋은 것은 파견지가 본사보다 집에서 더 가깝다는 정도였죠.그리고 셋째날 비로소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떨어진 첫번째 미션은 인터넷 검색(응?) 파견지에 나온 사람들 모두가 모르는 일(사장은 물론)이었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 지식을 정리하여 공유하는 것이 제 첫번째 역할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학습 조직의 역할(?)이었죠. 그럼 일은? 심지어 디자이너들은 할 일을 찾지 못해 파견지에서 본사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_-;; 더 충격적인건 프로젝트가 4개월이 진행되었음에도 처음 보는 제 눈에도 진행된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앞으로 겪게될 모든 당황스러운 일들의 전주곡이었죠.그렇게 학습 조직(?)으로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하루에 한번씩 지식을 정리해서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사장님으로부터 또 다른 업무를 할당 받았습니다. 스토리보드를 그려보랍니다-_- 스토리보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 교육 받은 것 없이 일단 그려보라니.. 그래도 일단 어떻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를 참고해서 그려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장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_-;; 그 이후로 학습 조직의 업무에다 기획자로서의 임무가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말이 좋아 기획자의 임무이지 사실은 그동안 사장님이 했어야 하는 일들을 떠 맡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일들은 그럭저럭 대충이라도 흉내라도 낼 수 있었지만, 문서화라는 작업은 도저히 못하겠더군요. 입사한지 일주일도 안된 신입 사원에게, 그것도 4개월이나 진행된 프로젝트의 문서화를 하라니?(더 충격적인건 그동안 작업된 문서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할 수도 없다!) 문서화에 대해 사장님께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질문을 하니 이런 반응이 돌아오더군요.“지금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무능의 증거라고 봐도 되겠습니까?”그리고 일주일 되던 날, 같이 일하던 개발자에게 지금까지의 히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본래는 PM이라는 존재가 이 프로젝트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IT 바닥, 웹에서 경력 13년차의 외부에서 영입한 베테랑 인사였다는군요. 문제는 이 분의 경력이 너무 화려했다는 것입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도통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았답니다. 문제는 프로젝트에 대해 잘 알면서 그랬다면 상관 없지만 그 분도 아는 바는 없었다는 거죠. 결국 프로젝트는 4개월동안 삽질만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PM이 클라이언트(갑)와의 회의에 더이상 들어오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 이 분은 퇴사하셨다는군요.

안돼! 난 빠져나가야겠어

IT에 오래 있으신 분들은 이 대목에서 감이 오실겁니다. 시작부터 망조가 들어있던 프로젝트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따낸 것인지.. 그것도 수수께끼였죠.(공공기관의 저가 입찰과 무리한 일정, 무모한 프로젝트 추진이 왜 문제가 있는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밀려드는 기획 임무에서 허덕인지 한달이 조금 못되어서 이번엔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갑자기 잡힌 미팅이라 준비가 아무것도 안되어있었다는거죠. 설상가상으로 오전 중에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줄 프로토타입 사이트의 스토리보드를 몇 개(!?)나 만들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_-; 피를 토하며 오전 중에 스토리보드를 그야말로 막 그려서 세개 정도 갖고 갔습니다.보통 기획안을 몇가지 들고 갈 경우 A, B, C의 안을 들고 갑니다. A안은 개인적으로 공을 가장 많이 들인 최고의 안이고, B는 A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좀 허접하게 만든 안, C는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선택되서는 안되는 안이죠.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비극은 두번이나 일어났습니다. 일단 첫번째 비극은 클라이언트가 오전 중에 막 만든 기획안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이고, 두번째 비극은 그것도 C안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설상가상으로 제가 미팅에 참석한 이후 회사의 신뢰도도 다소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일의 폭발을 의미했습니다. 이후로 저는 10시 이전에 집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정시 퇴근 보장-_-. 이 규정 덕에 추가 수당 같은 것도 받지 못했죠. 6시 이후에는 일을 하느라 늦게 간게 아니라 회의를 하느라 늦게 퇴근했습니다. 회의를 꼭 6시 이후에 해야하는건지.. 하지만 사장님의 의지가 아니라 협력사(이쪽은 H사 계열 대기업)의 뜻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클라이언트가 정한 프로토타입의 개발 기한은 2주. 3일만에 디자인을 뽑아야했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2주 안에 요구 기능을 다 맞추어야 했습니다.(그나마 오픈소스 기반이었기에 보여주기만하는 용도로는 가능했지만.) 이쯤되니 서서히 몸도 정신도 지쳐가더군요. 마침 디자인이 나왔는데 이건 또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일정을 맞춰야 한다는 판단에 그대로 디자인을 클라이언트 쪽에 넘기고 말았죠. 그리고 당연히 클라이언트는 이게 뭐냐는 반응이 나왔고.. -_- 저는 사장님께 불려가 시말서를 써야했습니다. 디자인이 그렇게 나온건 사장님 책임이 아니라 담당 기획자 탓이라는 것이죠. 아.. 이때쯤 되니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어쩌면 프로젝트가 망하면 그것도 프로젝트의 유일한 기획자인 제 탓으로 몰리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는 입사한지 두 달만에 그렇게 준비 중인 프로토타입만 완료하고 퇴사하기로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다시 프로토타입 디자인 준비로 돌아가(어쨌든 일은 끝내야 했으므로-_-;;) 디자인을 수정하려고 보니 C 기획안은 애초부터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디자인이 나올 수 없는 기획안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인가젯 같은 기획안에 네이버 같은 디자인을 요구한 격이랄까요. 애초에 맞출수가 없는 요구사항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사장님께 말씀드렸지만 사장님은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오면 어쩔꺼냐고 말씀하셨습니다. -_- 그럼 제가 관두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더 말씀 없으시더군요. 그 이후로 본사 디자이너에게 두 차례나 디자인을 맡겼지만 더 나을바 없는 디자인이 나왔습니다. 결국 협력사(말이 협력사지 또 다른 갑이죠. 이른바 하청의 재하청.)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해서 애초 기획안을 완전히 무시하는 디자인이 탄생했고, 클라이언트는 이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클라이언트에게 중요한건 기능이나 프로젝트의 취지 등이 아니라 모양이었던 것이죠. 결국 이 디자인대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프로토타입 발표 전 날 아침, 테스트를 해볼 겸해서 접속해보니 404 에러가 브라우저에서 뜹니다.(응?) 전날 저녁 개발자 중 한 분이 소스를 말끔하게 날려버리신 것이었더랬습니다. 내일이 발표인데! 백업도 없고.. 하다못해 문서도 없었으니 진정 공황 상태에 접어들게 되더군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되겠죠”하며 웃는 개발자..-_-;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뭐라할 수 없는 것이 역할은 기획자지만 직급은 가장 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획자가 가장 직급이 낮으면 이런 일도 다반사로 발생하죠. 다행히 본사 서버라서 백업 솔루션을 통해 전전날 백업을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모두가 야근을 해야했죠.프로토타입을 발표하고, 본사에 내려가 계시던 사장님께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하게 해줄테니 계속 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미 이런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 한시간 동안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들었지만 한번 든 생각은 돌릴 수 없었습니다. 사장님 말대로 어차피 대기업엔 갈 수도 없는 스펙이었고, 이곳을 나와서 얼마나 백수 상태가 될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딜가든 이곳보다 낫겠지하는 생각이 당시엔 더 컸습니다. 당연히 집에서도 오랜 백수생활을 끝내고 겨우 들어간 직장을 관둔다고 하니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정말 당시엔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 일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입사 처음에 사장님께 들었던 제가 하게 될 일이라는 것은 해보지도 못한 채 나오게 되었군요.그렇게 저는 두달간의 고행(?)을 마치고, 다시 원래 일하던 학교로 돌아가게 됩니다.(당시 돌아온 저를 받아주신 조교님과 학장님도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제하고 나니 이 정도 밖에 안 남는군요.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써볼 수 있겠죠. 어쨌든 다음 편에 계속.덧. 중요한 내용을 빼놓은 듯해서 내용을 한 문단 더 추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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