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미러 시즌 7 후기

넷플릭스에서 블랙미러 시즌 7을 봤습니다. 블랙미러는 유일하게 넷플릭스에서 챙겨보는 시리즈로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기술 소재의 드라마고 옴니버스 식 구성도 좋아해서 시즌 1부터 즐겨보고 있습니다.

시즌1부터 상당히 독한 영국식 블랙 유머가 마음에 들었는데 어쩐지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특히 시즌 5는 음.. “기술 발전이 주는 폐해를 경고한다”는 정체성 자체가 갈피를 못 잡는 느낌이랄까요.

최근 나온 시즌 7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라 시즌 6을 1화만 보고 바로 시즌 7로 건너뛰었습니다.

시즌 7 1화 “보통 사람들”은 뇌사 환자가 클라우드에 자신의 뇌 기능 일부를 업로드해서 일종의 구독료를 내고 살아간다는 내용으로 확실히 블랙미러의 초반 시리즈스러운 내용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와 서비스가 구독제로 돌아가는 세상, (특히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의료 보험, 의료 민영화의 문제를 꼬집었습니다.

시즌 7 1화를 보니 다른 에피소드도 기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블랙미러가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했죠.

어차피 옴니버스 구성이라 그 다음은 에피소드를 건너뛰고 4화 “장난감”을 봤습니다. 게임 소재의 내용이고 최근 출시된 넷플릭스 게임과도 연관이 있는 내용이라 궁금했거든요.

가상의 디지털 생명체를 창조해낸 게임 개발자와 그 게임을 우연히 실행해본 게임 잡지 기자의 이야기인데.. 음 이건 뭘 말하고 싶었던거지 싶더군요. 굳이 왜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천재적인 개발자라도 해도 그 당시 게임 시스템으로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굳이 게임 소재여야 했는지도 모르겠고.

뭔가 또 불길한 느낌..

그 이후로 나머지 에피소드는.. “호텔 레버리” 정도 빼고는 다 별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최악은 위에서 이야기한 “장난감”과 시즌 마지막화 “USS 칼리스터 : 인피니티 속으로”. 특히 후자는 예전 시즌 4인가 나왔던 “USS 칼리스터”의 후속작인데 무려 1시간 반짜리 에피소드인데 굳이 후속작을 만들어야 했나 싶은 내용이라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왜 블랙미러가 갈수록 별로가 되고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결국 현실이 드라마 내용을 압도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블랙미러의 여러 에피소드들이랑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비교해보면 블랙미러의 세상이랑 별로 다를바가 없거든요. 오히려 더한 일도 일어나고 있는 마당이죠.

생성형 AI와 데이트하고 있는 사람들, AI가 자살을 부추겨서 자살한 소년, AI 때문에 자신이 우주의 비밀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호텔 리버리”보다 더 심한 방식으로 배우들의 젊은 모습을 렌더링하고, 이미 사람들은 가상 현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다만 그게 여러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처럼 직접 뇌와 연결하는 장치가 아닐 뿐)

이건 블랙미러가 아니라 얼마전 WWDC에서 발표한 비전 프로의 데모입니다

이미 현실은 블랙미러보다 더 은밀하고 더 끔찍한 방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블랙미러가 이야기하는 현실은 과거의 사람들이 상상했던 시절의 SF를 보는 것처럼 될 수 밖에 없는거죠. 현실은 언제나 사람의 창작성을 추월하기 마련이니까요. 오히려 블랙미러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현실보다 더 인간적인 것 같기도 해요.(시즌 5의 이야기긴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미더린”의 CEO 같은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긴 할까요.)

휴머노이드 로봇이 택배를 분류하는 장면(CG 아닙니다)

뭐 그렇다보니 시리즈 전체가 역동성을 잃은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끔찍하게 그려내도 현실이 더 끔찍한 세상이니까요. 그렇다보니 실제 내용보다는 시각적으로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는거겠죠. 시즌 7 5화 율로지의 장례식 장면처럼 말이죠.

그러고보면 시즌 7 5화의 율로지는 오히려 드라마속 세상이 더 따뜻한 느낌이었습니다. 분명 현실보다 발전한 기술을 사용하는 세상인데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현실보다 더 인간적인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이건 시리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외부적인 문제라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그래도 분명 몇가지 에피소드는 볼만해서 골라서 보시는걸 추천합니다.

최근 에피소드 기준으로 보면 시즌 6의 1화(조안은 끔찍해), 시즌 7의 1화(보통 사람들), 3화(레버리 호텔), 5화(율로지)를 추천합니다. 그래도 시리즈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는 시리즈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