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은 저한테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영감을 주었던 슈퍼 히어로 중 하나였습니다. 슈퍼맨은 너무 쉬워보였고(?) 스파이더맨은 거미에 물려서 생긴 능력이라는게 약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었죠. 뛰어난 추리력과 과학의 힘, 그리고 무술 실력을 합쳐 적들을 제압해 나가는 배트맨은 앞의 두 영웅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같은 이유로 아이언맨도 좋아합니다.)
물론 나이가 들고보니, 차라리 외계에서 왔거나, 거미에게 물리는 것만큼, 세상의 모든걸 다 가진 백만장자가 도시를 위해 발벗고 나서서 개고생을 하는 것도 못지않게 판타지스럽더군요.
어린 시절부터 배트맨 애니메이션, 장난감을 비롯해 배트맨 영화, 게임 등 원작 코믹스만 제외하고 모든 미디어를 접했던 것 같습니다. 코믹스는 그 당시엔 구하기가 좀 어려웠었죠. 미국 만화 자체가 접하기도 어려운데다 한글화 된 출판물을 보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트맨이 악당들을 때려잡는 것보다, 배트맨이 어려운 난제를 추리력으로 풀어나가고 결국에 범인을 잡는, 그런 “탐정” 같은 면모를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배트맨의 또 다른 별명은 세계 제일의 명탐정)
그런 제가 레고 배트맨을 안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전에 개봉했었던 레고 무비는 안봤지만, 레고 배트맨은 예고편을 보자마자 “어머 이건 봐야해!”라고 했었죠.
하지만 레고 배트맨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역대 배트맨 영화 중 제일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일단 상영관 자체가 많지 않았고, 상영을 해도 조조 시간대(…)에 주로 더빙으로 상영하더군요. 배급사 측에서는 주요 관객층을 어린이로 설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자막판으로 겨우 봤는데요, 배트맨의 팬으로서는 만족할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배트맨의 역사와 수 많은 미디어에서 나왔던 모습을 알고 있다면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이 등장합니다. 전 가장 웃었던 장면이 바로 로빈이 배트케이브에서 “상어 퇴치 스프레이”를 찾아낼 때였는데요, 이건 60년대 영화 아담 웨스트의 영화 <배트맨 무비>에서 배트맨이 상어와 혈투를 벌이면서 썼던 아이템입니다. 이 장면이 상당히 인상 깊었는지 배트맨 관련 미디어에서는 상어가 꼭 한마리씩 나오기도 합니다.(대표적으로 아캄시티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상어..)
이렇듯 여러가지 배트맨 패러디가 많아서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DC 코믹스의 팬이라면 최근 개봉했던 <뱃대숲>이나 <자살특공대> 같은 작품에서 해소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해소할 수 있습니다. 배트맨 캐릭터 뿐 아니라 역대 등장했던 배트맨의 인기 있는 악당들부터 인기 없던 악당들까지 다 나옵니다. 특히 전형적인 배트맨 영화처럼 시작해서 액션 활극으로 끝나는 초반 10분~15분 정도는 정말 재밌게 봤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스토리 부분입니다. 배트맨에서 전통적으로 다뤄지는 여러가지 주제들이 빠짐없이 나오고 이를 잘 버무린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지만 정작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특성 자체는 많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탐정처럼 수사를 통해 범인을 잡는 배트맨의 모습이 이 영화에서는 많이 보여지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전형적인 레고 영화처럼 감동과 교훈을 주는 코드로 진행이 되지만, 그 과정은 좀 뜬금없고 정신이 없습니다. 후반은 액션이 쉴새없이 몰아치지만 지루한 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평을 하자면 “배트맨과 DC의 팬이라면 혼자 보는게 나은 영화”입니다. 분명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봤지만, 같이 봤던 배트맨과 DC의 팬이 아닌 일행은 영화 중간에 집중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배트맨을 잘 몰라도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재밌고 교훈적인 내용이라 좋은 것 같습니다. 왜 배급사에서 어린이를 타겟으로 잡았으며 그게 얼마나 옳은 결정이었는지 알겠더군요.
덧. 제 옆에는 누가봐도 덕으로 보이시는 분이 계셨는데, 정말 전문가의 포스가 흘렀습니다. 저 같이 배트맨을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겠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