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후기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폭싹 속았수다>를 봤습니다. 원래 최신 드라마를 챙겨가며 보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건 별 생각 없이 2막 오픈했을 때부터 챙겨가며 본 것 같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별 기대없이 봤는데 돌이켜보니 이렇게 히트할 줄은 몰랐더랬습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여느 드라마와 같은 소년(관식)과 소녀(애순)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녀가 이야기의 중심이고 이 소녀가 커가면서 겪는 여러 한계들(섬이라는 한계, 가난이라는 한계, 고아라는 한계, 여자라는 한계)이 주 내용이지만 결국엔 이 소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소년 없이는 소녀의 인생은 섬에 사는 다른 여성들과 큰 차이 없이 흘러갔을지도 모르거든요. 소녀도 나름대로 발버둥치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년을 만나서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하니까요.

물론 K드라마 공식처럼 무슨 재벌2세를 만나서 인생이 확 펴는 것은 아닙니다. 소년도 고달픈 인생이긴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사적으로 재벌2세를 만나서 구원 받는 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드라마의 장점이자 한계점도 이 지점에 있습니다. 결국 고통 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전의 우리나라 드라마와 다른 점이 분명히 있어보이지만 그를 극복할 수 있었던 주체는 결국 양관식이라는 소년의 존재입니다. 소년이 소녀를 돋보이게 하고 소년이 소녀가 다른 인생을 사는 선택지를 만들어줍니다. 이건 이 감독의 전작인 <나의 아저씨>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공교롭게도 구원 받는 존재가 또 아이유네요)

주제만 보면 좀 더 진보적이고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안전한 선택을 한거겠죠.(일부러 제주 4.3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 것도 말이죠.) 드라마 자체가 애순이 인생 같습니다. 야망이 크고 포부도 컸지만 실제로는 가정이라는 안전하고 평범한 선택으로 귀결합니다. 안심되는 결말이고 안정적인 이야기이긴 해요. 잘못했다는건 아니지만 아쉽긴 하다는거죠.

뭐 어쨌든 초반과 달리 후반이 평범하게 흘러갔다는 걸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드라마였습니다. 이런 장르의 드라마를 재밌게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거의 모든 장면장면이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게 만들고 눈물도 빼게 만듭니다. 부부간의 연, 부모와 자식의 관계 등 한국인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마구 흔듭니다. 제주도 이야기이고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은 공감도 갈만한 이야기가 많았을거에요. 저 개인적으로도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한 일을 겪었던 장면도 꽤 있었습니다.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하고 실제로 각 인생의 단계를 사계절로 비유하고 조명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계절별로 나오는 연출이 꽤 디테일합니다. 오프닝도 예쁘게 만들었는데 드라마랑도 잘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한국 드라마의 공식이 보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시리즈를 처음 봤는데(오징어 게임 안본 사람임) 넷플릭스 컨텐츠 제작 능력이 이 정도구나 하는 감탄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넷플릭스가 다 해먹을 지도.. -_-;;

덧. 개인적으로 1막 ~ 4막을 나눠서 공개한 형식도 나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4막이 좀 아쉬웠습니다. 사실 3막까지 풀어야할 이야기들이 많이 남았다는 느낌이긴 했는데 4막부터 갑자기 풀 악셀로 달려가는 느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든요.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은유한 것인지. 딸(금명)도 마지막쯤 되었으니 너무 후다닥 성공하는 느낌. 이렇게 급하게 달릴거면 3막의 부상길의 서사를 너무 길게 넣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