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리뷰와 달리 이번 글은 스포일러가 가득한 33 원정대의 스토리에 대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를 자제하느라 언급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그냥 두서 없이 써봤습니다. 따라서 이 게임을 아직 플레이 중이시거나 플레이하실 예정이라면 이번 글은 읽지 않으시는걸 추천합니다.
1막 : 구스타브
33 원정대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페인트리스’라는 존재로부터 절멸의 위기에 처한 인류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페인트리스를 제거할 원정대를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구스타브’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죠.
페인트리스는 아주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거대한 ‘거석’에 숫자를 그리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나이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고마쥬(사라지다의 프랑스어) 됩니다. 34 숫자가 사라지고 33이 되는 순간 34세에 해당하는 나이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사라집니다. 구스타브의 연인인 소피도 올해 고마쥬된 사람 중 한명이었죠.
이야기는 구스타브가 연인 소피를 고마쥬되는 순간 떠나보내기 위해 함께하면서 시작됩니다. 소피를 떠나보내고 난 뒤 구스타브는 33 원정대에 합류합니다. 어차피 원정대에 합류하지 않으면 내년에 죽는건 마찬가지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원정대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33 세입니다. 다만 구스타브의 제자인 ‘마엘’만 빼고. ‘마엘’은 올해 16살로 아직 고마쥬까지는 멀었지만 세상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원정대에 합류합니다.
원정대가 페인트리스를 제거하기 위해 도착한 순간, 원정대 앞에 존재할리 없는 어떤 노인이 나타나고(34세 이상의 사람들은 없어야 하니까) 원정대를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원정대는 구스타브와 마엘을 비롯해 몇몇을 빼고 전멸당하고 구스타브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원정을 이어갑니다.
…라고 구스타브의 시점으로 이어가는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구스타브는 사실 가짜 주인공이었습니다. 스토리상 초중반에 살해당해서 이후에 등장하지 않거든요.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서 구스타브를 중심으로 키웠던 플레이어를 당황하게 만드는 첫번째 구간이죠. 이 게임은 이런식으로 전통적인 RPG의 스토리 전개를 이리저리 뒤틀어놓습니다.
구스타브는 초반에 등장했던 노인인 ‘르누아르’로부터 마엘을 구하기 위해 본인의 목숨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베르소’라는 수수께끼의 캐릭터가 나타나 원정대를 구해줍니다. 이 베르소가 스토리상 진짜 주인공입니다. 구스타브를 중심으로 키웠다면 구스타브의 스킬이나 능력치 모두 베르소가 물려받습니다.
이런 갑작스러운 주인공 교체는 또 다른 주인공인 ‘마엘’이 겪는 상실의 아픔에 몰입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에 등장한 베르소에게 별로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구스타브는 처음부터 플레이어와 함께한 주인공이지만 베르소는 어디서 갑자기 갑툭튀해서 주인공 행세를 하니 정이 안갑니다. 게다가 뭔가 숨기는 것도 많아보이는 캐릭터라 플레이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베르소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이건 이후에 등장하는 엔딩 분기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전 엔딩보는 끝까지 베르소를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2막 : 베르소
어쨌든 베르소는 원정대에 갑자기 합류해서 이어가는데, 사실 최초의 원정대인 0(제로) 원정대의 일원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모험 중 밝혀지는 정보지만 사실 최초로 만났던 노인은 베르소의 아버지이자 0(제로) 원정대의 대장이었죠.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비롯한 자신의 식구들은 페인트리스로부터 영생할 수 있는 힘을 받았고 아버지는 그 힘을 축복이라고 생각해서 페인트리스가 제거되는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런저런 힘든 고행 끝에 일행은 페인트리스가 있는 거석에 도착하고, 치열한 싸움 끝에 페인트리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그 전에 당연히 먼저 르누아르도 제거합니다.)

전투 중 페인트리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던 원정대에게는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죠. 페인트리스를 제거하고 고향으로 향하는 원정대. 고향 뤼미에르에서는 원정대의 개선을 환영하는 축제가 열립니다.
그런데 축제 중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고마쥬되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갑자기 멸망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거죠. 베르소는 모든걸 알고 있다는 듯 담담히 종말을 받아들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마엘’의 과거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마엘’은 사실 현실인 파리에 살고 있는 ‘알리시아’라는 인물로 가족 전체가 캔버스에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화가들이었습니다. 르누아르, 베르소 모두 원래 현실세계의 알리시아의 가족들이었죠.
자세한 이야기는 길지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파리의 ‘화가’와 ‘작가’들은 전쟁 중이었는데(뭔가 권력 다툼 같은게 아니라 진짜 전쟁으로 추정됨) 르누아르의 가족은 화가 조합의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알리시아의 어떤 실수로 작가들이 집에 불을 지르게 되고 알리시아는 한쪽 눈과 성대를 잃고 베르소는 목숨을 잃었죠.
베르소의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베르소가 그린 그림 안으로 들어가 베르소가 그린 세상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르누아르는 그런 부인을 말리기 위해 캔버스로 들어가 세상을 파괴하려고 했죠. 오랜 싸움 끝에 어머니가 이겼지만 아버지의 힘을 억누르는데 그칠 뿐이었죠. 다만 그마저도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페인트리스’가 되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걸 경고하기 위해 바위에 숫자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힘이 약해지는만큼 그 나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거죠. 즉 페인트리스가 사람들을 제거한게 아니라 르누아르가 사람들을 제거하고 있던 겁니다. 페인트리스가 사라지니 르누아르는 세상의 모든걸 제거해버린거죠.
0 원정대의 일원이라고 했던 르누아르와 베르소는 사실 진짜가 아니라 페인트리스가 창조해낸 그림 속 인물이었습니다. 그림에서라도 가짜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거죠. 이 가짜 가족의 존재 때문에 플롯이 예측 불가능하게 가버린 셈입니다만.
여기가 이 게임이 스토리를 비틀어버리는 두번째 포인트입니다. 사실 인류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장대한 모험을 떠났던 원정대의 이야기가 갑자기 한 가족의 비극과 그로 인한 부부 싸움(…)이었다는걸로 밝혀지니까요. 충격적인 반전이긴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허무개그 같기도 합니다.
페인트리스는 죽어도 현실세계의 인물이므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입니다. 다만 그림속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 없이 그냥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거죠.
‘마엘’은 원래 알리시아가 부부 싸움을 말리러 그림 속으로 들어갔던건데 그만 기억을 잃고 그림 속 인물로 다시 태어나 16년을 그림 속에서 살았습니다.(현실 세계와 그림 세상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듯) 그래서 그림 속 세상인 뤼미에르에 대한 애착이 있었죠.

그래서 마엘(알리시아)은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3막 : 마엘
3막의 주인공은 마엘로 결국 그림 속 세상을 지우려는 아버지에게 대항해 세상을 지켜내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림에서 부인도 꺼내는데 힘들었던 마당에 딸까지 그렇게 둘 수는 없다고 하며 서로 대립하죠. 마엘은 스스로 페인트리스가 되어 그림 속 세상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르누아르는 딸에게 패배하고 결국 딸이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신도 그림을 순순히 떠납니다.
마엘은 르누아르에게 조금만 그림 속 세상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사실 그림 속 세상에서 평생 살 생각이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 봐야 한쪽눈도 안보이고 온몸은 화상에 말도 못하는 처지이니까요. 그에 비해 이 세상에서 자신은 너무 자유로운 존재였죠.
하지만 베르소의 기억을 통해 페인트리스가 만들어낸 존재인 가짜 가족의 일원 ‘베르소’는 그걸 거부합니다. 베르소는 그림을 계속 그려야하는 베르소의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 그림을 지워달라고 마엘에게 애원합니다. 마엘은 그걸 거부하고, 그에 따라 엔딩 분기가 나눠집니다.

마엘로 싸우면 마엘 엔딩으로 가게 되고, 베르소로 싸우면 베르소 엔딩으로 타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 엔딩 둘 다 봤지만, 둘 다 뭔가 씁쓸한 엔딩이었습니다. 마엘 엔딩을 타게 될 경우 뤼미에르는 그대로 남게 되지만 마엘이 페인트리스가 되어 점점 어머니처럼 정신이 이상해지는 묘사가 나오고, 베르소 엔딩을 타게 될 경우 르누아르의 가족은 모두 재회하지만 그림 속 세상의 인물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전통적인 RPG에서는 분명 해피 엔딩과 배드 엔딩, 히든 엔딩이라는게 존재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두 엔딩 다 회색에 가깝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현실 세계로 가족이 돌아오는 베르소 엔딩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림 속 세상의 사람들도 진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몽땅 사라진 것도 별로 해피엔딩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기본적으로 결국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가족간의 갈등이었다는게 밝혀지다보니 뭐 이리 극단적인 가족이 다 있나 싶습니다. 대화를 해서 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너무 완고하고, 어머니는 너무 자신만의 세상에서 슬퍼하고, 딸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아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들은 아랑곳도 하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대화로 풀 수 있었다면, 아버지는 딸과 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어머니는 남겨진 가족들의 생각을 좀 더 했더라면, 아들은 여동생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줬더라면, 마엘은 아버지를 설득해서 캔버스를 남기고 필요할 때마다 왔다갔다 했더라면, 어쩌면 해피엔딩도 가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이야기는 좋았는데 어떻게보면 좀 굳이 굳이 극단적으로 몰고간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무리
어쨌든 스토리에 대해서 할 말이 꽤 많았는데 어디에다 쓰자니 결국 스포일러 공격이라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써봤습니다.
최근에 했던 게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스토리를 가진 게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심오하거나 철학적인 결말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스토리를 이리저리 비틀고, 반전을 예측 가능하게할만한 것들을 잘 숨겨둔 훌륭한 시나리오였던 것 같습니다. 후반부 전개가 전개를 위해 좀 극단적으로 치달은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뭔가 요즘 유행하는 평행 우주의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은 맞았네요. 물론 평행 우주나 멀티버스 같은 식으로 흘러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덧. 게임 이름인 클레르 옵스퀴르는 명암 효과라는 뜻으로 그림 용어입니다. 최종 보스의 이름도 ‘페인트리스’였고 게임 이름도 그렇고 알고보면 애초에 그림 속 이야기라는 복선이 여기저기 깔려있었던 셈이죠.
덧2. 딱히 현실 세계와 그림 속 세계가 구분이 힘든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실과 그림을 구분할 수 있는 단서가 딱 하나 있는데, 에펠탑입니다. 에펠탑이 똑바로 서 있으면 파리, 즉 현실 세계, 아니면 뤼미에르, 그림 속 세상이죠.
덧3. 파리의 또 다른 이름이 “빛의 도시”, 즉 뤼미에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