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Ol’ Days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힙한 젊은이(…) 한 분을 봤습니다. 이 세상에서 멸종된 기술로 휘감은 분이었어요. 일단 귀에는 유선 헤드셋이 있었고 헤드셋은 무려 블랙베리에 연결되어있었습니다. 패션은 90년대의 아이돌 같은 스타일이었죠. 사실 블랙베리가 아니라 허리춤에 워크맨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레트로 감성이었습니다.

복고, 나아가 레트로가 유행하면서 요즘은 패션 뿐 아니라 옛 기술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CD가 사라진지도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LP 판이 다시 부활하며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LP 판 판매가 CD 판매를 추월했다고 합니다. 사실 LP가 음악 기술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스트리밍이나 20년 전의 CD에 비해서 나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노래도 몇곡 안들어가고 또 뒤집어야 하고 말이죠.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레트로의 감성이 개인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옛날 기계들에 갖고 있는 추억이 있긴 하지만, 그저 추억으로 묻어둘 만큼 요즘의 기술과 기계들은 정말 너무 좋거든요.

특히 개인적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바로 유선 이어폰을 쓰던 시절입니다. 에어팟 이전의 시절로는 전 절대로 못 돌아갈 것 같아요. 길에서 꼬여있는 이어폰을 풀다가 10분을 허비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이어폰 줄에 손이 걸려서 멀쩡한 핸드폰이나 MP3 플레이어가 박살이 나기도 했습니다. 주머니에 있던 아이팟 셔플에 이어폰을 꽂으려다가 떨어뜨려서 잃어버렸던 일은 기억조차 하기 싫습니다.

이어팟의 착용감은 좋아했기 때문에 나중에 언젠가 이어팟 모양의 무선 헤드셋이 나온다면 반드시 구매를 하려고 이를 갈았습니다. 나중에 에어팟이라는 물건이 나온 뒤 고민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모든 유선 이어폰을 갖다 버렸죠.

왜 갑자기 이어폰 이야기냐면, 오늘 이런 글을 봤기 때문입니다.

https://jmmv.dev/2023/06/fast-machines-slow-machines.html (영문 주의)

요약하자면 과거의 컴퓨터와 요새의 컴퓨터가 사용하는데 있어서 속도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옛날 컴퓨터에서 실행하던 프로그램들이 더 빠르다는 것이죠.

아래 두 영상을 보면 2000년에 사용하던 윈도우 NT를 실행하는 컴퓨터에서는 메모장이나 터미널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빠르게 실행됩니다. 하지만 윈도우 11을 실행하는 서피스 고 2 에서는 분명히 똑같은 앱을 실행해도 시간의 텀이 발생하죠. 서피스 고 2가 그렇게 빠른 컴퓨터는 아니지만 맥 프로에서 실행한 결과도 동일했습니다.

물론 서피스 고 2가 그렇게 빠른 시스템은 아니지만, 그래도 20년 전의 컴퓨터보다는 훨씬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프로세서의 속도도 빠를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걸까요?

사실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옛날의 컴퓨터는 해상도도 낮았고 그래픽을 처리해야하는 부담도 훨씬 덜했으니까요. 윈도우 11 같은 현대 운영체제는 백그라운드에서 실행되는 것들도 많고 해상도나 그래픽도 훨씬 좋습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 성능이 좋아졌다고 해도 분명히 성능 차이는 존재할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윈도우의 기본앱인 메모장과 터미널, 탐색기 등에서도 느리다는 것은 문제가 좀 있어보이죠.

해당 글에서는 원인을 결국 무거워진 운영체제와 방만해진 소프트웨어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빨라진 하드웨어만큼 운영체제가 하는 일이 많아졌고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는 웹 기반이거나 크로스플랫폼을 기본적으로 가정하고 만들어지면서 점점 무거워진다는 것이죠. 위 글쓴이는 결국 이런 발전 방향은 기업들이 소프트웨어에 투자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결국 사용자에게 속도라는 부담으로 돌아온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최근의 운영체제가 무거워지고 프레임워크가 크로스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사용자에게도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앱 개발이 점점 쉬워지면서 개발에 대한 장벽이 많이 낮아졌고, 사용자들에게 필요한 앱들이 많이 등장했고 이런 앱들이 꼭 윈도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OS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었으니까요.

결국 해당 글에서는 컴퓨터의 발전은 어디로 향하는가 질문합니다. 하드웨어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는데 오히려 사용자들은 예전보다 더 느리게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컴퓨터 발전의 의미가 무조건 빠른 속도에만 있을까요? 오히려 빨라진 하드웨어 덕분에 예전에는 불가능했을 “웹 기반의 앱”이 사용 가능해졌고, 백그라운드에서 클라우드와 통합하여 문서를 백업하는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컴퓨터가 지금까지 발전해온 방향은 메모장을 두배 빠르게 실행하는게 아니라, 모든 사용자가 좀 더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리속도가 빨라야하고 메모리도 높아야하죠. 빨라진 하드웨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빨라진 하드웨어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컴퓨터를 쓰는 것이 단순해졌습니다.

좋았던 옛날을 한번 회상해봅시다. 옛날 컴퓨터는 정말 빨랐습니다. 윈도우 98부터 윈도우 XP를 쓰던 시절까지 앱이 실행되는 속도 자체는 지금의 컴퓨터보다 훨씬 가벼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켜지는 시간은 엄청 느렸죠. 학교 갔다가 오면 일단 발로 컴퓨터를 켠 다음 교복을 갈아 입고 한참 지나서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시끄럽기도 엄청나게 시끄러웠죠. 인터넷에 연결하려면 온 집의 전화를 마비시키는 모뎀을 쓰거나, 조금 더 돈이 있으면 LAN을 쓸 수 있었지만 너무 비쌌습니다. 윈도우는 여러모로 좋았지만 레지스트리가 뻑이나거나 무거워져서 사용하다보면 점점 느려지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컴퓨터를 쓰려면 주기적으로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해줘야 했습니다.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할 동안은 두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빨간 네모가 초록색으로 바뀌는 장면만 봐야 했죠. 또 오랫동안 쓰면 디스크의 논리 오류가 증가하게 되어 디스크 검사를 해줘야 했습니다. 윈도우 XP에서는 아예 부팅할 때마다 디스크 검사를 시행하기도 했죠. 그렇게 주기적으로 관리해줘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프로그램이 중간에 꺼지는 등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좀 더 과거의 도스 시절로 돌아가보면 게임을 할 때마다 내가 쓰고 있는 사운드 카드의 모델명을 찾아서 설정해줘야 했습니다. 적합한 드라이버를 게임에서 내장하고 있어야 했거든요. 또 메모리가 부족해서 config.sys 파일을 열어 EMS 메모리를 별도로 할당해줘야 했었습니다. 컴퓨터를 끄기 전에는 반드시 시스템 종료를 해줘야 했고 효과가 있는지 알 수도 없는 park.exe 같은 파일을 구해다가 실행시켜줘야 했습니다.

좋았던 옛날이죠?

저는 지금 M2 맥북에어를 쓰고 있습니다. 보통 끄지 않고 잠자기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열자마자 켜지는데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팬 자체가 없어서 실행되는 소리조차 없습니다. SSD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디스크 조각모음이 필요하지 않죠. 최신의 안정적인 파일시스템 덕분에 디스크 조각모음도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

웹캡을 새로 사도 그냥 꽂으면 알아서 인식하고 Xprotect(윈도에서는 Defender) 같은 보안 프로세스가 계속 실행되고 있어서 사용자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시스템의 보안을 강화합니다. 또 사용자가 인지하기 전에 모든 문서와 사진이 클라우드에 백업되죠. 게임이야 그냥 앱스토어나 스팀에서 받아서 실행시키면 됩니다.

쓰지 않을 때는 그냥 닫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열어서 사용하면 되죠. 잠자고 깨우는 과정이 단순해진 것은 SSD와 RAM의 발전, 그리고 BIOS와 OS의 발전 덕분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사용자가 인식하기도 전에 수행하면서도 과거의 운영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죠.

옛날이 좋았다고 하지만 전 아무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M2 맥북 에어는 예전 인텔 맥북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M2 맥북 에어의 시스템 환결 설정의 실행 속도가 제가 10년 전에 사용하던 2013 맥북 에어에서 실행되는 스노우레오파드보다 10배 빠르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0년 전보다 훨씬 단순한 방법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서 파생된 터치 스크린 기반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는 말할 것도 없죠.

좋았던 옛날은 추억속에서 미화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발전을 단순한 잣대로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술은 속도의 향상 뿐 아니라 기술적 장벽을 허물어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방향으로도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기술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좀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술의 혜택을 보는 것이 기술의 발전 방향이라면 전 지지하고 싶습니다.

덧.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다보니 예전에 대학 다닐 때 후지쯔 p1510이라는 태블릿 PC를 이용해서 필기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배터리는 두시간 밖에 안가서 세시간짜리 수업 시간을 견디질 못했고, 발열이 너무 심해서 손에 저온 화상을 입었고, 소음 때문에 수업을 방해했고, 벽돌만한 전원 어댑터를 책상에 올려놓고 썼었죠. 벽돌만한 어댑터조차 전원 코드가 없는 자리에 앉게 되면 그냥 노트에 필기해야했습니다. 결국 그 학기 학점은 최악을 기록했죠. 지금 아이패드로 공부하는 학생분들이 너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