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컨텐츠의 속성과 장터 시스템

어제 “유료 컨텐츠 구매 문화 정착이 먼저인가, 유료 구매하기 좋은 시스템 구축이 먼저인가"를 갖고 트위터에 오래 떠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역시 길어질 주제라 생각해서 블로그로 옮겨왔다.

나는 아무리 디지털 컨텐츠를 기꺼이 유료 구매하는 문화를 독려해도,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절대 정착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보다 유료 컨텐츠 구매 문화가 잘 발달했다는 서양에서도 크랙이나 P2P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료 구매자들이 월등하게 편리한 구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아이튠즈나 스팀, 앱스토어 등이 그 예다. 이 세가지 서비스는 각각 음악, 게임, 소프트웨어에서 P2P 같은 어둠의 경로를 성공적으로 이겨냈다.

저 세가지 서비스는 어떻게 어둠의 경로를 이겨냈을까? 나는 저 세가지 서비스가 디지털 컨텐츠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한 서비스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컨텐츠의 대표적인 속성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재화"는 복제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독점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내가 가진 물건을 다른 사람에 준다면, 내 소유의 물건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디지털 컨텐츠는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 것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독점적인 성격보단 "공유"의 성격을 더 많이 띄는 것이다.

또한 디지털 컨텐츠는 "즉시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아날로그의 재화는 구매 후 나에게 도달되기까지 "배송"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디지털 컨텐츠는 구매 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컨텐츠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건 다시 말해 아날로그의 재화와 달리 디지털 컨텐츠에는 팔릴 때마다 소요되는 "변동 비용"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초기엔 "그” 서양권에서도 이런 디지털 컨텐츠의 속성 때문에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 이 특성들을 틀어 막는데만 신경을 썼다. 그 결과 DRM이나 CD-Key 같은 보안 방식이 탄생했다. 아이튠즈가 나오기 전 음악 서비스는 다운로드가 불가능한 스트리밍 방식 서비스만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디지털 컨텐츠의 편리한 특성에 빨리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복제가 가능하고 즉시 다운로드가 가능한 컨텐츠 배포 서비스 쪽으로 본능적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P2P 서비스다.

많은 사람들이 P2P를 “무료"라는 점 때문에 택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 당시 시스템은 유료로 정품을 구매한 사람들이 오히려 불편했고 별달리 장점도 없었다. 하지만 P2P는 컨텐츠를 이용하는 비용이 무료였을 뿐 아니라 다운로드도 빠르고 이용하기도 훨씬 쉬웠다. 디지털 재산권자들은 P2P가 자신들의 돈을 훔쳐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이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복제 가능하고 바로 다운로드도 가능한 컨텐츠 자체를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생각은 사실 꿈에 가깝다. 차라리 이 특성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대한민국 게임 업계는 그 해답을 MMORPG에서 찾았다. 온라인 게임 자체는 무료이고, 누구나 다운로드할 수 있다. 다만 거기에서 파는 (복제 불가능한) 아이템은 유료다. 여기에서 아이템은 일종의 재화라기보단 돈을 내고 이용하는 서비스의 개념에 더 가깝다. 디지털 컨텐츠를 서비스의 개념으로 접근한 것이다.(프리-미엄 앱이나 스트리밍 전용 음악 서비스와 같은 접근 법이다.)

아이튠즈, 스팀, 앱스토어 같은 다운로드 형태의 서비스도 이것과 비슷하다. 디지털 컨텐츠를 파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소유권을 판매한 것이다. 이런 서비스에서 사용자는 컨텐츠 자체 즉 패키지나 파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일종의 영구 이용권을 구매한다. 그리고 플랫폼 내에서는 구매한 디지털 컨텐츠를 마음대로 다운로드할 수 있고 여러 기기에 얼마든지 복제도 가능하다.

스티브 잡스는 "불법 사용자의 80%는 합법적이고 편리한 시스템이 있으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그 시스템을 이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아이튠즈와 스팀 이후로 음악을 무료로 공유하거나 게임을 무단으로 공유하는 어둠의 경로는 많이 사라졌다.

(잡스의 말을 지지하는 근거를 우리나라에서는 유료 웹하드 서비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용자는 컨텐츠가 충분히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다면 돈을 주고라도 컨텐츠를 받을 의도가 있는 것이다. 물론 웹하드는 대부분의 경우 합법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디지털 컨텐츠 장터는 디지털 컨텐츠의 특성에 맞서지 않고 디지털 컨텐츠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 특성을 살렸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사용자의 편의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컨텐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접근법으로 디지털 컨텐츠를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가장 디지털 컨텐츠에 몰지각한 시스템이 바로 전자책을 대여해주는 전자책 도서관 서비스다. 이 시스템을 이용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무려 대출/반납 시스템이 있다. 게다가 동시에 대출할 수 있는 권수도 제한되어있다. 아날로그 도서관과 100% 동일한 시스템이다. 이건 전자책이 복제 가능하며 독점적이지 않다는 속성을 완전히 무시한 시스템인 것이다.

만약 디지털 컨텐츠를 "대여"한다는 개념으로 본다면 수량 제한보다는 시간 제한을 두는게 더 자연스럽다. 스팀의 한정 시간 무료 게임과 같은 개념이다. 현재 전자책 도서관 서비스에도 대여 기간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사용자가 반납 버튼을 눌러야 되고(!), 반납 버튼을 기간내에 누르지 않으면 연체(!)가 된다. 코메디가 따로 없다. 거의 스큐모피즘 수준이다.

네이버N스토어나 알라딘의 무료 증정 이벤트에도 비슷한 것들이 보이는데 전자책과 영화를 "한정 수량"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재화를 무료로 주는 이벤트에서는 재화의 갯수만큼 비용(재화 가격 + 배송비 + 기타 비용)이 나가겠지만, 디지털 컨텐츠에서는 그런 비용이 추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량 제한을 두는 것은 수량이 떨어져 이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한 잠재 고객들이 유료로 구매해주었으면 하는 의도겠지만, 난 눈앞의 이익 때문에 더 큰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도 스팀을 생각하면 쉽다. 스팀에서 무료 다운로드 혹은 할인 게임은 수량 제한이 없다. 심지어 할인율이 80%대를 넘을 정도인데, 오히려 이런 할인이 게임사에게 실제로 이득을 주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높은 율의 할인은 출시되지 좀 된 게임의 구매를 다시 활성화 시킬 수 있다. 게임이 많이 팔린다고 게임사의 변동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할인율이 커도 온전히 이득으로 연결이 가능하다.

이런 접근법은 여전히 국내의 컨텐츠 배포(장터) 시스템이 여전히 디지털 컨텐츠를 아날로그의 재화와 똑같이 보려고 하고, 디지털 컨텐츠의 속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비단 서비스 제공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 재산의 소유권자들이 디지털 컨텐츠의 성격에 무지한 탓이다.

벅스는 초기에는 아이튠즈처럼 컨텐츠에 대한 소유권을 팔았다. 음원을 구매하면 이 음원은 무한히 스트리밍할 수 있고, 또 무한히 다운로드도 가능했다. 하지만 작년에 저작권자의 요청으로 구매한 음원은 스트리밍도 못하고, 다운로드 횟수도 3회로 제한하도록 정책이 바뀌었다. 음반 제작자들은 여전히 사용자들이 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에 대한 소유권을 산게 아니라 "MP3 파일을 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디지털 컨텐츠에 대해 이미 이용자들은 그 특성을 완전히 깨닫고 이용 중이지만, 지식 재산의 소유권자들은 기껏해야 "굿 다운로더 캠페인” 같이 전적으로 이용자의 탓만하는 캠페인이나 벌인게 다다. 문화는 시스템의 구축 없이 캠페인 같은걸로 이루어지기 매우 힘들다. 시스템을 구축하기 힘들다면 차라리 DRM을 없애고 디지털 컨텐츠의 속성을 살리는 게 옳은 일이다.

서비스 제공자, 지적재산권의 소유자들이 눈앞에 이익만 보지 않고 진정한 정답으로 접근하여 굳이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더 편리하고 저렴하며 합법적인 컨텐츠 장터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면 문화는 자연히 정착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협상을 진행할 능력자 혹은 기업이 국내에는 보이지 않는다는게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다.

덧. “한국인은 합법적이고 편리한 시스템을 만들어도 공짜를 좋아할 것이다” 라며 시스템이 구축되어도 문화가 없으면 소용없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것 같다. 난 이것에 대한 답을 유료 웹하드 서비스나 VOD 서비스 등에서 찾고 싶다. 솔직히 이 두 서비스가 딱히 편하지는 않지만 유료 구매가 생각보다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경로가 만들어지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덧2. 물론 시스템을 구축해놔도 20% 정도의 사용자는 여전히 “무료"를 찾아 불법적인 경로를 이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 사용자는 캠페인이나 문화가 정착되어도 움직이기 힘든 유형일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어둠의 경로가 사라지게 되면 이런 유형의 사용자도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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