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컴퓨터

오늘은 두 권의 책을 쓰게 해줬고, 어쩌면 내가 IT 쪽 직업을 갖는데도 도움을 주었던 내 첫번째 컴퓨터에 대한 추억 이야기.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꽤 좋아했었다. 컴퓨터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된건사양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흑백 컴퓨터. 사촌 누나가 쓰던걸 물려 받은 거였는데 디스크도, OS도 없었다.(믿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건 테트리스랑 GW-BASIC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걸로 글도 쓰고 간단한 프로그램도 만들고 했다.(테트리스는 나중에 플로피가 손상되어서 결국 못했다)

그 이후로도 집에 컴퓨터가 있긴 했지만 온전히 내거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는 없었다. 그러다가 고시 준비하며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는 핑계(?)로 노트북을 하나 구입했는데 그게 바로 진정한 나만의 첫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후지쯔 P1510이었다.

8.9 인치 디스플레이에 스위블 터치스크린 액정을 갖추고 인텔 펜티엄과 GMA 950 그래픽을 탑재했고 990g의 무게를 자랑하던 컴퓨터였다. 지금은 2 in 1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그냥 이런 컴퓨터를 통칭해서 태블릿 컴퓨터라고 불렀다.

사실 그 당시에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는데, 정발 가격은 221만원이었고, 내가 구매한 미국 병행 수입 모델(P1510d라는 모델)도 170만원이 넘었다. 물가를 생각하면 지금의 아이패드 프로는 우스울 정도. 확실히 내 형편에 무리이긴 했지만 노트북은 무조건 가벼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의 삥땅(?)과 무리를 감행해서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이 컴퓨터의 가장 큰 특징은 무게와 터치스크린. 그걸 위해서 모든걸 희생한 컴퓨터였다. 배터리 수명은 2시간 반(그것도 온갖 저전력 세팅을 했을 때)이고 화면도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패드 미니 수준의 크기였고, 해상도도 1024 * 768도 안되었다.

지금의 2 in 1 처럼 화면을 돌려서 터치스크린을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이었고, 가로 세로 스위블도 가능했다. 아이패드 나오기 5년 전에 나온 컴퓨터이니 나름 시대를 앞서가긴 했던 셈.(물론 엄청나게 불편했다.)

나름 세로로 세우고 트위터도 했었다!

여러모로 매니악한 제품이지만 나름대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전문 커뮤니티도 있었다.(지금은 사라졌다)

여기까지 들어서 아시겠지만, 아무리 봐도 동영상 강의를 보려고 산 제품으로 보이진 않는다. 나름 노트북을 사긴 했지만 어딘가 딴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공부에 쓰긴 했다.(옆에 있는건 아이리버 딕플)

이 컴퓨터가 인생을 트는 계기가 된건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 따라 인터넷과 컴퓨터가 너무 느렸다. 그 당시 운영체제는 윈도 XP였는데, 바이러스라도 먹은건지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하루를 다 날렸다.

그 때 하지 말았어야 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윈도우를 지워버리고 다른 운영체제를 설치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 알게된 것이 바로 우분투였다.

우분투는 어쨌든 기기 생명 연장에는 도움을 주었지만,(구매 후 맥북 에어로 대체하기 전까지 8년 정도 썼었다.) 이상한 종교에 심취하게 만들었는데 RMS와 오픈소스 같은 이상한 종교였다. 윈도우를 밀어버리고 우분투를 세상에 전파하자! 공부하기 싫은 고시생의 머리속에 이상한 것들이 자리잡았다.

게다가 아시겠지만 리눅스는 동영상 강의 플랫폼과 전혀 맞지 않았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고 우분투 세팅하는데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 씩을 보냈다.

P1510은 우분투랑 대부분 잘 맞았지만 일부 드라이버 지원이 부족했는데, 크리티컬하게도 터치스크린이 지원되지 않았다. 터치스크린 드라이버 소스를 후지쯔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컴파일해서 설치해보기도 하고, 화면 이벤트를 감지해서 자동으로 방향을 바꾸는 쉘 스크립트를 짜서 백그라운드에서 구동하고 했었다.(이 블로그의 Ubuntu 카테고리에 그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

드라이버만 세팅한게 아니고 아이콘 팩도 만들어보고, 나비 입력기의 아이콘도 그려보고(공식 릴리즈에 포함됨), Compiz 로컬 번역팀에 참여해 한글 번역도 해보고(그때 같이 계셨던 분들께는 폐만 끼쳐 죄송한 마음 뿐이다) 여러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고 기여하기도 했다.

왼쪽 나비 아이콘이 GIMP로 직접 그렸던 Unity 나비 아이콘 테마

뭐 당연히 예상된 결과지만 시험은 두번이나 낙방했다.

그 당시엔 블로그(이 블로그이기도 하다.)를 열심히 했는데 우분투에 한 세팅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내가 잊어먹지 않으려고 쓴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글 덕분에, 그리고 한국 우분투 커뮤니티 덕분에, 인사이트 출판사 덕분에 두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권의 책 덕분에 IT 근처(?)의 일을 할 수 있었고, 결국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 후 P1510은 우분투에서 실행되는 가상머신에서 인터넷 강의를 돌리다가 팬의 베어링이 나갔었고, 수리해서 좀 더 썼지만 나중에는 디스플레이 수명이 다 되어 충혈(?)되었다.

새로운 컴퓨터 옆에 보면 확연히 빨간게 보인다.

당시 노트북은 LCD의 백라이트로 LED가 아니라 CCD를 썼는데(소형 형광등 같은거다) 이게 LED에 비해서는 턱없이 수명이 짧았다. 그래도 8년을 버텼으니 그 당시 노트북으로서는 정말 오래 썼던 것 같다.

그 이후 후지쯔는 P1610이나 u1010 등의 UMPC를 중심으로 여러 신제품을 출시했지만 영 반응이 신통치 않았고 결국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글로벌에서도 신통치 않아 결국 PC 사업을 레노보에 매각하고 일본 내수용 제품만 나오게 된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디바이스로 보면 노트북으로서의 포지션은 맥북 에어가 잇고 있지만, 직접적인 후계 기종은 역시 아이패드 프로인 것 같다. 아이패드 프로를 노트북으로 대체하려고 해도 자꾸 돌아오는걸 보면 첫 컴퓨터가 태블릿 컴퓨터였던 영향이 매우 큰 것 같다.

P1510을 만난건 20대의 인생의 격동기이긴 했지만, 하나의 물건이 인생이 영향을 이렇게 끼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P1510은 나에겐 더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