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의 소유에서 대여로의 변화가 가져올 PC의 모습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요즘은 스트리밍을 안쓰고 컨텐츠를 감상하시는 분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통신 기술과 프로세서의 발전은 음악과 동영상을 저장하지 않고도 서버에서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스트리밍과 더불어 등장한 구독 서비스는 컨텐츠 개별에 가격을 지불하지 않고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매력을 앞세워 컨텐츠 시장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기술적으로 스트리밍에 적합하지 않은 컨텐츠였던 전자책이나 게임도 이젠 구독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젠 디지털 컨텐츠를 소유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옛날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구독 서비스 하에서는 이용자는 컨텐츠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용권을 구독하고 있을 뿐이죠. 이용권이 만료되면 컨텐츠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도 사라지죠. 그런 의미에서 구독제 하에서 컨텐츠는 “대여”의 개념에 좀 더 가깝습니다.

모두가 디지털 컨텐츠를 소유하지 않고 대여하기만하는 세상. 그런 세상은 컴퓨터나 모바일 디바이스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예전보다 덜 중요해진 “저장”

기본적으로 컴퓨터에 저장되는 것들은 OS를 제외한다면, 크게 앱(소프트웨어), 문서(생산물), 게임, 동영상, 음악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중 앱과 문서(생산물)는 생산 컨텐츠로, 그 외 게임, 동영상, 음악 등은 소비성 컨텐츠로 나눌 수 있겠죠.

이 중 소비 컨텐츠는 위에서 언급했듯 소유에서 대여 개념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누구도 컨텐츠를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인터넷에 연결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게임을 제외하고 저장장치에 컨텐츠를 저장해놓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처럼 외장하드에 몇 백기가씩 영화나 음악 파일을 저장해놓고 있을 필요가 없죠.

반면 앱과 게임 같은 경우는 “설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저장되어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앱과 게임마저도 저장 장치에서 몰아내고 있습니다. 앱은 서서히 웹 앱이 그 역할을 대체해가고 있고 게임은 클라우드 게임으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문서(생산물)는 내 소유의 저작물이므로 내가 만든 컨텐츠는 로컬에 저장될 수 밖에 없겠죠. 극단적으로 본다면 결국 미래에는 저장장치는 생산물을 저장하기 위한 공간의 용도로 밖에 남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클라우드 서비스가 저장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죠.

결국 예전에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던 컨텐츠들은 이젠 다 클라우드에 있거나 구독 서비스에 있는 셈입니다. 앞으로 컴퓨터의 저장 공간은 무슨 용도로 남게 될까요?

제 생각엔 미래의 저장장치는 메모리처럼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해 클라우드에 있는 데이터를 다운로드해 잠시 로컬에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신망이 아무리 고속화되어도 대역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로컬에 저장하는게 가장 빠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저장장치(하드디스크)가 클라우드가 되고, 메모리의 역할을 저장장치가 하게 되는 셈이죠.

그 흐름은 벌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PC에 탑재되는 HDD는 많아봐야 2TB를 넘기는 모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대세가 된 SSD는 10년전만 해도 속도는 빠르지만 용량이 적었는데, 오히려 용량이 늘어나기보다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해야했지만 지금은 마치 메모리처럼 처리 속도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방증이죠.

미래의 PC는 씬 클라이언트 같을까?

이렇게 클라우드의 비중이 높아지다보면 결국 미래의 개인 컴퓨터는 씬 클라이언트 같아지지 않을까요? 씬 클라이언트(Thin Client)란 최소한의 컴퓨터 자원과 입력, 출력 장치만 갖고 중앙 서버에 접속하는 컴퓨터를 말합니다. 씬 클라이언트는 최소한의 컴퓨터 자원만 갖고 있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가볍고 얇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씬 클라이언트는 거의 모든 컴퓨팅을 중앙의 서버에서 처리합니다. 예전 PC 통신 시절에 오직 통신에 접속할 수 있는 기능만 갖고 있던 단말기(Terminal) 같은 개념이죠.

인터넷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많은 IT 전문가 들은 미래의 컴퓨터가 씬 클라이언트처럼 최소한의 기능만 갖추고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네트워크를 통해 강력한 서버가 중앙에서 모든걸 연산하고 연산된 결과를 개인용 컴퓨터는 그저 받아보기만 하면 되는 세상을 예상했죠. 그와 더불어 하드웨어 가격도 점점 저렴해져 컴퓨터가 대중화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예상은 이뤄지진 않았습니다. 제 생각엔 그 이유는 PC에 GUI(Graphic User Interface)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GUI는 일반적인 텍스트 기반의 통신 방식에 비해 훨씬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통신량도 방대해지고 연산도 많이 해야하죠.

근데 그 당시 네트워크 속도는 너무 느렸습니다. 서버도 여러대의 컴퓨터에 GUI를 띄울만한 성능을 갖추려면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죠. 한마디로 너무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차라리 개인용 PC가 좋은 성능을 갖추는게 훨씬 효율적이었죠.

GUI 뿐 아니라 PC에서 멀티미디어를 즐기는 수요가 늘어난 것도 문제였습니다. 동영상과 음악을 처리하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컴퓨팅 성능과 네트워크 속도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결국 PC는 씬 클라이언트는 커녕 오히려 성능이 강력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속도는 매년 빨라졌고 얇아지기는 커녕 더 커졌습니다. PC에 최대한 많이 저장해야하고 자체적으로 모든 작업을 수행해야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요?

어쩌면 지금은 다시 씬 클라이언트 같은 PC들이 대중화 될만한 시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일단 네트워크의 속도는 예전과 비교해 말도 안되게 빨라졌습니다. 심지어 5G가 일반화되면 무선으로도 더이상 네트워크의 장벽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봤듯 더이상 우리는 컴퓨터에 뭔가를 저장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컨텐츠는 모두 클라우드에 존재합니다.

이런 세상이라면, 어쩌면 예전에 실패했던 PC의 씬 클라이언트화를 다시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모든 PC, 나아가 개인용 디바이스가 더 얇아지고, 가벼워지고, 더 저렴해지는 세상 말이죠.

미래의 PC

하지만 이런 예상과 달리 클라우드나 스트리밍이 일반화될 수록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는 점점 더 성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사용했던 스마트폰인 노키아 5800은 트위터조차 힘들어했지만, 요즘 아이폰은 머신러닝 연산을 자체적으로 할 정도로 성능이 높아졌습니다. 인텔이나 AMD 같은 CPU 회사들은 아직도 속도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모든게 클라우드에 있는 세상인데 PC와 디바이스는 왜 성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걸까요? 제 생각엔 컨텐츠의 품질에 대한 수요가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폰만 해도, 최초의 아이폰은 480 x 320 픽셀에 불과했습니다. 근데 아이폰 11 프로 맥스의 해상도는 2688 x 1242에 달합니다. 면적이 커진데 비해 해상도가 엄청 높아졌죠.

당연히 첫 아이폰에 비해 아이폰 11 프로는 같은 작업에 더욱 많은 성능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최초의 아이폰 시절로 돌아갈 수 없죠. 그만큼 우리의 눈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즉 성능이 높아지는 이유는 고품질의 컨텐츠에 대한 수요도 같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미래의 PC를 대략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컨텐츠를 저장하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저장장치의 용량은 그렇게 늘어나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장장치는 처리속도가 높아지겠죠. 저장 용량은 적지만 속도는 빠른 SSD, 혹은 그 이상의 처리속도를 가진 저장장치가 필수가 될 것입니다.

프로세서와 네트워크, 메모리 등 처리 성능과 관계 되어있는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빨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동영상 컨텐츠는 4K를 넘어 8K 해상도까지 화질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점점 고화질화 되고 있기는 게임도 마찬가지죠. 이런 컨텐츠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고성능의 프로세서와 메모리, 고속의 네트워크는 필수가 될 것입니다.

마무리

이번 글에서는 미래 컴퓨터의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제 뇌피셜(?)에 불과한 상상이지만, 이미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이패드 프로만해도 용량은 2년전에 나왔던 아이패드 프로랑 거의 비슷하지만 처리 속도는 두 배 가까이 차이 납니다. 예전에 비교해봤던 2007년의 P1510과 2018년의 아이패드 프로는 처리 성능은 32배나 차이나지만, 저장 용량은 둘 다 64기가입니다. 저장 용량은 그대로지만, 처리 속도는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죠.

이번 글에서는 주로 내부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춰서 써봤지만, 폼팩터의 변화도 재밌는 이야기 주제일 것 같습니다. 2007년과 2020년의 기술을 비교해봤을 때 의외로 폼팩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게 결론이었는데요,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