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USB-C 이어팟 사용기

요즘은 USB-C 이어팟을 거의 주력으로 쓰고 있습니다. 예, 에어팟이 아니라 이어팟이요. 이어팟은 아이폰5 출시와 함께 소개되었던 애플의 유선 이어폰입니다. 요즘은 에어팟에 밀려서 별다른 이야기도, 주목도 못 받고 있지만 오리지널 에어팟 디자인의 원형이었고 꾸준히 팔리고 있는 제품이죠.

USB-C 이어팟을 구매하게된 계기는 에어팟 3세대가 사망하면서 였습니다. 한동안 괜찮아지는 건가 싶었는데 결국 왼쪽 유닛이 완전히 망가졌죠. 애플스토어에서도 사망 판정을 받았고 말이죠.

개인적으로 커널형 이어폰을 오래 쓸 수 없어서 오픈형 이어폰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문득 굳이 에어팟을 살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어폰을 밖에서 이동하면서 듣기도 하지만 한 자리에서 아이패드나 맥북에 연결해서 듣는 경우도 많거든요.

게다가 아이폰 15가 USB-C를 탑재하면서 이제 USB-C 이어팟 하나면 애플의 모든 기기에 연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에어팟을 썼던 이유 중 하나가 이어폰 하나로 애플의 모든 기기에 연결이 가능한 범용성이었는데 이제 이 문제가 해결된거죠.

USB-C 이어팟을 쓴지도 6개월 정도 되었는데 확실히 무선을 압도하는 유선의 장점이 확실히 있습니다. 단점 하나가 매우 크긴 하지만 말이죠.

가격

에어팟은 가장 저렴한 에어팟 2세대도 오픈마켓 기준 가격이 17만원입니다. 이어팟 가격은 애플 공홈 기준 25,000원인데 잘 찾아보면 2만원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도 있죠. 이어팟이 망가지거나 단선이 되어 6개를 추가로 산다고 해도 가장 저렴한 에어팟보다 쌉니다.

물론 무선 이어폰의 사용 편의성을 1:1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가성비 측면에서 봤을 때는 확실히 유선이 무선을 압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음질

음질은 당연히 무선보다 유선이 더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최근의 에어팟(특히 프로)은 여러가지 컴퓨터 보정 기능을 받기 때문에 사실 어떤 이어폰이 음질이 더 낫다고 평가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어팟은 그냥 이어폰이지만 에어팟 프로는 머리의 방향에 따라 소리를 다르게 들려주는 공간 음향 기능도 들어가 있고 Dolby Atmos도 지원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어팟은 애플뮤직의 무손실 음원을 지원합니다. 이 부분은 가장 비싼 에어팟 맥스 조차도 이길 수 없는 가장 큰 장점이죠. 이어팟이 애플뮤직의 무손실 음원을 지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었지만, 애플은 공식 문서에서 이어팟이 무손실 음원을 지원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라이트닝 / USB-C 이어팟에 내장된 DAC의 스펙은 최대 24비트 / 48kHz의 무손실 오디오를 지원한다고 합니다.

즉, 공간 음향 같은 컴퓨팅 보조 기능 없이 그냥 쌩 음질(?)만 따진다면 이어팟이 에어팟보다 훨씬 나은 음질을 들려준다는 거죠. 게다가 애플 뮤직에는 Dolby Atmos 음원보다 무손실 음원이 훨씬 많기 때문에, 범용성으로도 이어팟이 훨씬 좋다고 볼 수 있죠.

통화 품질

이어팟의 통화 품질은 에어팟과 비교하자면 압도적입니다. 요즘 에어팟도 지향성 마이크를 도입하고 노이즈 캔슬링을 개선하는 등, 통화 품질 향상을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어팟은 그냥 아무 기술 없이도 에어팟을 압도합니다. 일단 마이크 자체가 입 근처(리모컨)에 위치해 있고 마이크의 크기 자체도 크죠.

에어팟의 지향성 마이크도 나쁘지 않지만 마스크를 착용한채로 통화하면 제 목소리보다 주변음을 더 크게 잡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에어팟 프로로 통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이 제 말을 못 알아 듣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어팟은 마이크가 입 근처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통화해도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에어팟의 통화 품질 한계는 블루투스라는 기술의 한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블루투스는 대역폭이 좁기 때문에 송화와 수화를 양쪽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대역을 나눠서 써야합니다. 그래서 에어팟으로 음악을 들을 때 음질은 좋지만 통화할 때 음질은 그보다 못한거죠.

이어팟은 당연하게도(?) 유선이기 때문에 블루투스보다 대역폭이 훨씬 넓습니다. 통화할 때도 아이폰을 통해 직접 듣는 것과 동일한 음질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건 통화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죠. 일반 통화 말고 페이스타임이나 보이스톡을 이어팟을 통해 써보시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실 수 있을겁니다.

이런 장점 때문에 혹시 에어팟을 쓰고 있더라도, 통화나 화상 미팅을 자주하신다면 유선 이어팟을 사용하는걸 추천합니다.

게임 성능

요즘은 무선 이어폰이 대중화 되면서 “게임 성능”이라는 것도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보통 이어폰에서 게임 성능이라고 하면 응답 속도를 나타냅니다. 블루투스는 무선 대역폭의 한계로 음악을 압축해서 전송하고 수신하는 기기에서 압축을 해제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연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걸 엄청나게 줄인 이어폰들이 “게이밍 이어폰”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는거죠.

에어팟의 경우 지연율은 140ms 정도입니다. 게이밍 무선 이어폰은 블루투스가 아닌 다른 무선 기술을 사용해서 30ms 정도까지 지연율을 낮췄죠.

유선 이어팟은 당연하게도(?) 5ms 정도로 엄청난 응답속도를 보여줍니다. 리듬 게임을 하기에도 손색 없는 속도죠. 이 정도면 인간이 지연을 느끼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어팟은 웬만한 게이밍 이어폰의 10분의 1 가격으로 훨씬 더 높은 성능을 기대할 수 있는 거죠.

휴대성과 착용감

휴대성과 착용감 측면에서 이어팟의 가벼운 무게는 큰 장점입니다. 이어팟에는 역시 당연하게도(?) 배터리나 전원과 관련된 부품이 없습니다. 유닛에는 소리를 나게 하는 부품만 있죠. 에어팟은 상위 모델로 갈 수록 무거워지는데 가장 가벼운 에어팟 2세대조차도 이어팟의 유닛 무게와 비교하면 무겁게 느껴집니다.

가벼운 무게는 좋은 착용감으로 이어집니다. 에어팟을 쓰다가 이어팟을 쓰면 귀에 착용한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죠. 물론 이어팟에는 줄 무게가 존재하고 이게 밖에서는 상당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에어팟의 무게보다 가볍습니다.

휴대하는 부피 측면에서도 케이스에 들어간 에어팟보다 그냥 줄을 말아서 들고 다니는 이어팟 쪽이 훨씬 부피가 적습니다. 위 사진처럼 유닛 두개를 밴드(이 부분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로 연결해주면 선이 엉키지도 않죠. 그리고 당연히 배터리가 아예 없기 때문에 배터리 걱정이나 충전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결성

이어팟은 연결성에서도 에어팟을 압도합니다. 에어팟은 새로운 기기와 연결하기 위해 페어링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죠. 물론 애플 기기 끼리는 자동 전환 기능을 지원하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간편해졌습니다만 여기에 스팀덱 같은 비 애플 기기가 끼면 불편해집니다. 자동 전환 기능이 매번 잘 작동하는 편도 아니고 말이죠.

반면, 이어팟은 그냥 어디에든 꽂으면 됩니다. USB-C 이어팟은 범용성이 한층 더 좋아졌는데, 맥북, 아이폰, 아이패드, 스팀덱 등 USB-C 포트가 있다면 어디에 꽂아도 잘 연결됩니다. 새로운 기기라고 하더라도 페어링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가장 큰 단점, 유선

이어팟은 에어팟에 비해 많은 압도적인 장점을 갖고 있지만, 딱 하나의 단점이 모든 장점을 상쇄합니다. 바로 유선이라는 점이죠.

처음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무선 이어폰에는 없는 유선 이어폰의 장점이 크게 다가 왔지만 왜 사람들이 금방 에어팟에 열광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실내의 고정된 자리에서 쓸 때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밖에서 걷거나 약간의 운동만해도 이어팟의 줄이 크게 걸리적거립니다.

실내에서도 소스 기기가 조금만 멀어져도 이어팟은 쓸 수 없습니다. 저는 맥북을 TV에 연결해서 자주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데, 이때도 이어팟을 사용할 수 없죠. “줄”이라는 큰 물리적인 제약이 이어팟의 많은 장점을 상쇄합니다. 그래서 에어팟이 등장하자마자 이어폰 시장에서 대세가 된거겠죠.

그럼에도, 이어팟

그럼에도 에어팟이 대세인 시대에 이어팟의 매력은 분명히 있습니다. 무선이 커버할 수 없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주로 밖에서는 에어팟을 쓰고 실내에서 고정된 자리에 앉아있을 때는 이어팟을 사용합니다. 특히 통화 품질에서 압도적이라 화상 미팅이나 통화를 할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어팟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 무선 이어폰을 쓰고 있더라도 유선 이어폰 하나 정도는 서브 목적으로 두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특히 무선 이어폰을 사용한지 오래되신 분이거나 계속 무선 이어폰만 사용하신 분들이라면 유선 이어폰을 써보시면 뭔가 로스트 테크놀로지를 만난 느낌이실겁니다.(새삼 놀라운 포인트 : 이어폰이 충전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시장의 대세는 무선 이어폰일겁니다. 무선 이어폰이 발전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유선 이어폰을 따라잡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거니까요. 위에서 말한 이어팟의 장점을 무선 이어폰이 따라 잡는 순간 아마 유선 이어폰은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분명 유선 이어폰은 자기만의 자리가 있을 겁니다. 애플 등 주요 제조사들이 유선 이어폰을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오랜만의 이어팟 사용 후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