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아(Nokia)의 추억

오늘은 오랜만에 노키아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처음 썼던 스마트폰은 노키아에서 만든 5800 Xpress Music이었습니다. 5800은 우리나라에 두번째로 출시된 노키아 스마트폰이기도 했죠.(첫번째는 슬라이드 형태의 6210s) 아이폰 첫 출시와 함께 국내 스마트폰 태동기에 같이 들어온 외산 스마트폰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윈도모바일을 사용한 삼성의 옴니아, 애플의 아이폰, 그리고 가성비를 노린 노키아의 5800 이렇게 세개의 스마트폰이 3파전을 벌였었습니다. 당시 경쟁 구도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안드로이드가 80% 넘게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따로 없습니다.

많은 분들은 노키아를 어떻게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해외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시장 점유율 1위의 핸드폰 제조사이자 스마트폰 제조사였습니다. 아이폰이 처음 출시되었던 2007년만 하더라도 노키아가 주도해서 개발한 ‘심비안’ 운영체제는 전세계 핸드폰의 50%를 넘게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조차도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 심비안 기반의 ‘옴니아 HD’라는 핸드폰을 만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심비안 뿐 아니라 노키아가 제조한 핸드폰 자체의 점유율도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지금으로 따지면 안드로이드와 픽셀폰도 전부 1위를 해먹는 상황과 비슷할겁니다. 불과 10년이 조금 넘은 시절의 이야기지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되죠.

그렇게 명성을 떨쳤던 노키아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 비슷한 것 조차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0년이 되는 기간 동안 그야말로 폭삭 망해버렸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심비안 시대 : 화려했던 옛날

노키아 이야기를 하자면 심비안(Symbian) 이야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심비안은 노키아가 주도해서 개발한 운영체제로 여러 제조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제작하는 스마트폰 운영체제였습니다. 노키아 뿐 아니라 소니 에릭슨, 삼성 전자 등도 지분을 갖고 있었죠. 지금보면 조악하기가 피쳐폰을 갓 벗어난 형태로 보이지만 앱도 설치되는 의외로 멀쩡한(?) 범용 운영체제였습니다. 심비안을 탑재한 이후부터 진정한 의미의 스마트폰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비안의 장점은 가벼움에 있습니다. 원체가 전화기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운영체제이기 때문에 윈도를 경량화한 윈도 CE나 윈도 모바일보다 가벼운 성능에도 속도가 더 빨랐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대부분의 전화기에 맞게끔 키패드에 최적화된 운영체제였습니다. 심비안은 10년전만해도 대부분의 전화기 폼팩터였던 폴더폰이나 슬라이드폰에 맞는 운영체제였습니다. 북미에서는 노키아 점유율이 저조했지만 아시아나 유럽에서 노키아와 심비안의 맹위는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과반 이상의 점유율을 갖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 첫 스마트폰인 5800만 해도 전세계적으로 1400만대(그 당시 스마트폰으로서는 엄청나게 많이 판 대수..)를 팔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삼성도 옴니아 HD라는 심비안 기반의 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심비안 폰 옴니아 HD (출처 : 위키백과사전)

이렇게 잘 나갔던 심비안이 꼬이기 시작한건 아이폰이 출시된 이후였습니다. 아이폰이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를 도입하면서 스마트폰의 폼팩터는 전면 터치스크린으로 순식간에 대세가 바뀌었습니다. 이런 시장의 흐름에 노키아도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전면 터치스크린을 도입한 스마트폰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운영체제였습니다. 심비안은 터치스크린에 도무지 최적화된 운영체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영화 <다크나이트>에도 나왔던 5800 Xpress Music(출처 : 위키백과사전)

하지만 노키아가 심비안을 버리기엔 심비안이 너무 잘 나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노키아는 심비안의 인터페이스만 뜯어고친 s60 버전을 만들면서 전면 터치스크린을 탑재한 스마트폰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5800 Xpress Music 입니다. 5800은 새로운 폼팩터를 도입한 노키아의 야심작(…)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실상은 시장의 요구에 억지로 응답한 것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이름도 Xpress Music에서 알 수 있듯 아이팟처럼 음악에 특화된 스마트폰이었을 뿐이었죠. 이때까지만해도 노키아는 아이폰을 아이팟의 스마트폰 버전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겁니다. 심비안은 인터페이스만 터치스크린에 맞게 뜯어 고친 운영체제였기에 새로운 폼팩터에서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크롤도 느리고, 터치스크린으로는 정밀한 조작이 어려워서 스타일러스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후 N97이라는 플래그쉽 스마트폰도 터치스크린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하드웨어 키보드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하드웨어 키보드를 사용하는게 더 편했을 정도였습니다. 심비안은 서서히 노키아의 발목을 잡는 천덕꾸러기가 되가고 있었습니다.

심비안 전성기 시대의 플래그쉽 N97 (출처 : Wiki 백과사전)

하지만 노키아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심비안의 문제를 내부적으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아예 새롭게 리눅스 기반의 운영체제인 마에모(Maemo)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에모는 태생부터 터치스크린용 인터페이스를 고려한 노키아의 차세대 운영체제가 될 운명이었죠.

미고 시대 : 몰락의 시작

마에모는 데스크탑 리눅스를 스마트폰에 맞도록 개량한 운영체제였습니다. 아이폰의 운영체제가 그 근간을 유닉스 기반 운영체제인 맥OS에서 가져왔듯, 데스크탑 리눅스를 경량화하여 스마트폰에 쓸 수 있도록 개량했고, 실제로 N900이라는 결과물도 나왔었습니다. 거의 리눅스에서 실행하는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심지어 GIMP도 깔리던..) 저도 너무나 갖고 싶었던 스마트폰이었죠. 물론 결과물은 기대보다는 좀 더 소수를 위한 제품에 그쳤지만(N900이 어느정도 매니악했냐면 제품 개봉할 때도 노트북을 상자에 연결하고 해킹을 해야(…)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심비안보다는 속도면에서 훨씬 나았고 발전 가능성도 높아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봐도 너무 갖고 싶은 N900..(출처 : 위키백과사전)
대기업이 쉽게 가질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잘 나가는 사업부의 목소리가 커진다는 점입니다. 마에모를 차세대 운영체제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잘나가는 심비안 사업부는 마에모가 커지는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내부적으로 보기에도 심비안은 이미 완성되어있고 시장 점유율도 어느정도 갖추고 있는데 마에모는 너무나 부족했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으니 부족해보일 수 밖에 없었죠. 그러다보니 노키아는 심비안으로 계속 스마트폰을 만들어대고, 마에모는 그냥 계속 ‘차세대 운영체제’인 채로 세월만 보내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심비안만 붙잡고 있다간 망하게 될거라는걸 2010년쯤의 노키아는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N8”이라는 심비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스마트폰을 만들었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어정쩡했거든요. 칼자이스 렌즈에, 화소수도 1200만 화소로 당시 컴팩트 디카 수준의 카메라를 갖고 있었지만(아이폰은 2015년에야 아이폰6s가 탑재됨)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쯤되니 노키아도 심비안을 버릴 용기가 생깁니다.

카메라가 강점이었던 Nokia N8 (출처 : 위키백과)

심비안을 버리기로 한 노키아에겐 차세대 운영체제 마에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에모의 완성도는 살짝 모자랐습니다. 뭔가 또 다른 카드가 필요했죠. 만약 누군가가 노키아 몰락의 주요 원인을 꼽으라면 전 친구를 잘 못 사귄 것을 꼽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노키아는 첫번째 잘못된 친구를 사귑니다. 하필 인텔과 손을 잡기로 한 것입니다. 인텔은 스마트폰 프로세서 시장을 선점하고 싶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스마트폰은 ARM 기반이었습니다. 인텔 CPU는 컴퓨터에는 맞았지만 스마트폰에서는 너무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문제가 있었죠. 인텔은 베이트레일 플랫폼을 스마트폰에 밀고 싶었고, 또 그에 최적화된 운영체제도 필요했습니다. 근데 마침 차세대 운영체제를 만들고 있고, 자기네 CPU를 대량으로 써줄 고객을 찾은것이죠. 노키아는 그렇게 인텔과 손을 잡고 기존의 마에모 운영체제를 미고(Meego)라는 새로운 운영체제로 탈바꿈합니다.

미고의 목표를 잘 알 수 있는 초창기 로고 (출처 : 미고 재단)

미고는 인텔 CPU 기반에 여러 플랫폼에서 실행되는 것을 목표로한 전방위적 운영체제였습니다. 스마트폰부터 TV까지, 거의 모든 플랫폼에 실행되는 운영체제였습니다. 옛말에 호랑이를 그리려고 해야 고양이도 그린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전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굶어죽는다고 생각합니다. 미고의 꿈은 너무 원대했습니다. 당장 스마트폰용 운영체제도 못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컴퓨터 운영체제도 만들어야 하고 TV 운영체제도 만들어야하니 허리가 휠지경이죠. 지금은 그 애플도 각각 플랫폼에 맞는 운영체제가 따로따로 있고, 업계 1위인 안드로이드 조차도 스마트폰 외에서는 그다지 힘을 못쓰는 상태임을 생각해보면 이 꿈이 얼마나 거창한지 잘 알 수 있죠. 그렇게 미고 기반의 스마트폰은 계속 지연되고 소문으로만 내려오는 스마트폰이 됩니다. 한시가 바쁜 상황에 그렇게 3년이 지연되었습니다. 미고는 실패한 것이 기정 사실인 것처럼 보였죠. 그러다가 노키아는 스티븐 엘롭(Stephen Elop)이란 CEO를 만나면서 전환기를 갖게 됩니다.

윈도폰 시대 : 끝 없는 추락

스티븐 엘롭(Stephen Elop)은 미국인으로 주로 핀란드인이 CEO였던 노키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줄 인물로 기대되었습니다. 이 분은 그 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임원 출신이셨죠. 노키아에게 북미 시장은 어떤 로망이 있던 땅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심비안 기반의 스마트폰이 잘 나갈 때 북미에는 블랙베리가 있었고 아이폰도 있었죠. 한번도 북미에서 노키아는 제대로된 힘을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노키아의 영웅 스티븐 엘롭 (출처 : 위키)

미국 출신 CEO를 기용한 배경에는 이런 북미 시장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리콘 밸리 출신의 기업들(애플, 구글 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잘 나가니 미국, 그것도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잘 나가는 마이크로소프트 출신 CEO를 기용하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던 측면도 있었겠죠. CEO로 기용된 후 엘롭은 복잡한 제품 라인을 정리하고 심비안을 빠르게 손절하고 심비안을 오픈소스화(실질적으로는 방치)하는 등 비효율적이던 노키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관료적이고 결정이 느렸던 노키아에도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죠. 근데 이 아저씨가 좀 지나니까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합니다. “노키아를 구원할 새로운 운영체제는 윈도폰(Windows Phone)이다!” 그리고는 인텔도 무관심해진 미고 프로젝트를 정리합니다. 미고 프로젝트는 계속 지연되긴 했지만 사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Nokia N9라는 플래그쉽 스마트폰을 출시하기 직전인 상태였습니다. 결과물도 꽤 괜찮았죠. N9는 N8의 디자인을 이으면서도 안의 디자인은 노키아스럽게 깔끔하게 마무리한 스마트폰이었습니다. 미고도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심비안에서는 볼 수 없던 빠릿한 속도, 스마트폰을 위아래로 스크롤하면 각기 다른 기능을 쓸 수 있는 제스쳐 기반의 인터페이스(아이폰에서 iOS6~7부터 도입된 알림센터, 카메라 불러오기 등의 동작과 유사한..)도 참신했습니다.

Nokia N9가 제대로 나왔으면 아이폰 따윈 안썼을텐데.(이미지 출처 :

Med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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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롭은 마무리 단계에 있던 N9를 출시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죠. “노키아가 더이상 미고 기반의 스마트폰을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윈도폰이 짱이니까)” 더이상 제조사에서 만들 계획도 없는 플랫폼의 스마트폰을 누가 살까요? 노키아의 차세대 폰이었던 미고 기반의 N9는 그저 그렇게 출시되었다가 그저 그렇게 없어집니다. 노키아는 N9와 더불어 키보드가 달려있던 N950이라는 스마트폰도 만들고 있었는데 이 스마트폰은 그냥 미고 개발자용으로 5000대만 만들고 말았습니다.

같은 미고 기반이지만 키보드를 갖췄던 Nokia N950 (출처 : 위키)

엘롭은 그 이후 노키아 스마트폰에 윈도폰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모바일 6.0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개선해 스마트폰 운영체제로 만든 윈도폰 7을 만들었습니다. 근데 이 운영체제를 제조사들이 써줘야 안드로이드와 iOS와 경쟁해볼만할텐데 제조사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랜 파트너였던 삼성도 윈도폰을 만들긴 했지만 갤럭시 브랜드의 안드로이드로 재미를 보고 있던 터라 윈도폰에 대해서는 뜻뜨 미지근 했습니다. 근데 (위태롭지만 세계 1위 제조사인) 노키아가 윈도폰을 본격적으로 도입해준다니! 플랫폼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죠.

Nokia N9의 디자인을 재활용(?)한 Lumia 800. 근데 이것도 정말 갖고 싶었죠.(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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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는 루미아(Lumia) 브랜드로 윈도폰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 나왔던 플래그쉽 루미아 800의 디자인은 노키아 N9의 디자인과 똑같았습니다. 미고 기반의 스마트폰 껍데기를 그대로 사용해서 윈도폰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죠. 이 디자인은 루미아의 상징과도 같아 기본적으로 루미아 폰은 N9의 디자인을 계승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보다 한단계 아래 등급의 루미아 710이 출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 두번째 스마트폰이 이 루미아 710이었죠. 솔직히 루미아 710은 노키아 하드웨어라고 믿기지 않게 문제도 많고 조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왼쪽이 루미아 710. 당시는 아이팟 터치와 함께 쓰고 있었는데 윈도폰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은 정말 좋았습니다. 디자인만. (출처 : 이 블로그)

하지만 윈도폰이 노키아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했던 엘롭의 말과 달리 노키아 스마트폰은 침체가 계속됩니다. 루미아 시리즈를 계속 만들긴 했지만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삽질로 윈도폰 자체도 방황을 거듭했죠. 윈도폰도 신통치 않았고 루미아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노키아는 루미아 브랜드로 윈도폰을 만들면서 침체되다가 아예 2013년에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스마트폰 제조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해버립니다. 노키아는 더 이상 노키아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을 만들 수 없다는 조건도 함께 말이죠. 이렇게 노키아의 스마트폰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엘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롭은 놀랍게도 마이크로소프트로 돌아가 무선사업부의 장이 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노키아 무선 사업부를 가져다준 공으로 스티브 발머 이후 차기 CEO로도 언급되기도 했죠. 결과적으로 이 아저씨는 노키아를 망하게 했고, 노키아 무선사업부를 그대로 들고 마이크로소프트로 돌아간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으로 CEO 후보까지.. 겉으로 보기엔 스파이로 오해하기 쉽상이었지만 전 엘롭이 스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엘롭은 노키아의 영웅이었습니다. 노키아는 엘롭 덕분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죠.

Nokia N1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매각한 노키아 무선사업부는 사실 노키아의 핵심 사업이었지만 골칫덩이이기도 했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해도 애플과 구글에 밀려서 재미를 못보고 있었고 빚도 많아 재무 상황도 심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접자니 너무 큰 사업이었고.. 그렇다고 수익은 안나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마이크로소프트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꽤 후한 금액으로 말이죠. 노키아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자금도 받고 무선사업부의 재무적 상황까지 한 큐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노키아로서는 회생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반대로 이렇게 구매한 노키아의 무선사업부는 탄탄하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재무상황이 휘청이는 계기가 됩니다.) 보통 노키아가 핸드폰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노키아는 꽤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네트워크 장비 사업이 있습니다. 최근에 LG UPLUS가 화웨이의 장비를 사용한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던 바로 그 분야말이죠. 노키아의 신임 CEO로 발탁된 라지브 수리는 노키아가 네트워크 장비 사업에 올인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말썽 많고 탈도 많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던 무선 사업부를 정리해버렸으니 어차피 노키아는 B2C 사업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노키아는 B2B 사업만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모든 B2C 사업을 정리해버립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뛰어난 스마트폰용 지도 서비스인 노키아맵(Ovi Map)이 있죠. 노키아 지도는 한창 애플지도 때문에 고생하던 애플도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BMW에 매각되었습니다.(현재는 Here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 앱으로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심비안에서 실행되던 Ovi Map(이미지 출처 :

Softt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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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는 지금도 B2C 사업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매각시 걸었던 조건 때문입니다. 노키아가 사업부만 팔아버리고 다시 노키아 브랜드로 스마트폰을 판매할 것을 우려해 마이크로소프트는 “2024년까지 노키아는 노키아 브랜드로 스마트폰을 만들지 못한다”는 조건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2014년에 폭스콘에서 Nokia N1이라는 안드로이드 기반 태블릿 PC가 출시됩니다.(응?) Nokia N1은 노키아가 폭스콘에 의뢰해서 만든 브랜드만 노키아이고 제조는 폭스콘에서 하는 ODM 방식으로 만든 태블릿 PC였습니다. 애초 계약 조건에 스마트폰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 태블릿 PC를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었다는 거죠(…)

아이패드 미니 사이즈의 안드로이드 태블릿 Nokia N1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Nokia N1은 생긴건 아이패드 미니와 똑같이 생긴 7.9인치 안드로이드 기반의 태블릿 PC였습니다. 아이패드 미니와 디자인이 똑같아서 표절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만든 곳이 아이패드도 생산하는 폭스콘이니 우연은 아니겠죠(…) Nokia N1은 아이패드 미니와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 태블릿으로 어느정도 인기는 있었지만 더이상 후속 기종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노키아가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게 의의랄까요. 이후에는 노키아 브랜드로는 더이상 태블릿 PC는 만들지 않고 스마트폰만 나오게 됩니다.

HMD Global과 Nokia 9

2016년이 되자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폰 사업이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합니다. 스티브 발머의 뒤를 이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신임 CEO는 윈도폰 운영체제를 비롯해 스마트폰 제조사업까지 싹 다 정리해버립니다. 원래 노키아의 무선사업부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스마트폰 제조부문이 매물로 나오자 HMD 글로벌이라는 회사가 나타나 폭스콘과 분할 방식으로 인수합니다.HMD 글로벌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스마트폰 제조 부문을 인수한 다음 노키아와 노키아 브랜드 사용권을 10년 계약합니다. 그리고 폭스콘과 함께 노키아 브랜드의 스마트폰을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은 전부 HMD 글로벌에서 디자인, 설계하고 폭스콘에서 제조한 스마트폰입니다. 블랙베리, 코닥 등 예전에 브랜드로 유명했던 기업들이 중국 제조사에 브랜드를 팔아(?) 스마트폰을 만드는 사례가 많이 있죠. 노키아 스마트폰도 유사하게 노키아가 HMD에 브랜드만 빌려주고 노키아는 스마트폰 제조에 관여하지 않습니다.(2024년까지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은 유효한 것이죠.)

HMD 글로벌에서 제조한 노키아 브랜드의 폰들(출처 : 위키백과)

근데 이 HMD 글로벌이라는 회사는 약간 수상합니다. 다른 브랜드처럼 브랜드만 빌려주고 위탁 생산하는 형태라고 보기엔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일단 이 HMD 글로벌은 본사가 핀란드에 과거 노키아였던 마이크로소프트 건물 옆에 있습니다. HMD 글로벌을 설립한 CEO와 회장(Chairman)은 핀란드인이고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의 임원이자 과거 노키아에서 일했던 무선 사업부의 임원이기도 합니다. 즉 과거 노키아의 임직원들이 핀란드의 과거 노키아 본사 옆에 세운 회사가 HMD 글로벌인 것이죠. 그리고 HMD는 노키아 브랜드를 빌려오긴 했지만 노키아 폰만 만듭니다. 사실상 노키아의 스마트폰 제조부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노키아는 스마트폰을 직접 만들지 않지만 노키아 출신이 핀란드에서 노키아 폰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요상한 형태가 된 형국입니다. 이는 아마 마이크로소프트의 스마트폰 제조 금지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편법(?)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노키아가 만드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노키아는 여전히 스마트폰 사업을 직접하진 않습니다.

Nokia 9 Pureview.. 뒷면은 볼 수록 적응이 안되는군요(출처 : Nokia 9 홍보 비디오)

최근에 HMD는 카메라가 9개 달린 기괴한 디자인의 Nokia 9 Pureview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Pureview라는 이름은 엘롭 시절 노키아가 뜬근없이 공개한 심비안 기반의 4200만 화소(!)의 전화가 되는 디지털카메라(…) Nokia 808 Pureview에 있던 브랜드 네임입니다. 카메라를 강조했던 Pureview 이름 답게 Nokia 9도 자이스 렌즈 기반에 9개의 카메라로 카메라 기능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죠. 특히 Pureview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과거 노키아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묘한 향수도 불러 일으킵니다.

스마트폰 기능을 갖춘 4200만화소의 디지털 카메라 Nokia 808 Pureview(출처 : 위키백과)


Jolla와 Sailfish OS

노키아 스마트폰의 정신적 잔재는 HMD 글로벌만 있는건 아닙니다. 노키아가 윈도폰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미고 개발진은 노키아를 퇴사하고 핀란드에서 Jolla(한국식 발음이 아니고 욜라라고 읽습니다.)라는 회사를 창립하고 미고를 계승한 SailfishOS를 만듭니다. Jolla는 당시 미고가 갖고 있던 특징을 대부분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Sailfish는 리눅스 기반이었던 미고의 특징을 살려 안드로이드 앱과의 호환성을 갖추고 있기도 했습니다.

N9 같기도 한 특이한 디자인의 Jolla(욜라)(출처 :

Jolla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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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lla는 유럽에서 일정 점유율을 얻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큰 반향을 이끌어내진 못했습니다. iOS와 안드로이드가 시장의 99.99%를 먹고 있는 스마트폰 운영체제 시장은 이미 신규 운영체제가 들어가기엔 너무 비좁아졌습니다. 같은 시기에 Firefox OS가 사라졌고 우분투모바일OS도 사라졌습니다. Sailfish는 아직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곤 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해보입니다.(미고는 이래저래 안될 운명이었는지..) 차라리 현재는 HMD의 Nokia 브랜드 스마트폰이 좀 더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노키아 스마트폰은 왜 망했을까?

지금까지 노키아의 10년을 돌아봤습니다. HMD를 통해 노키아 브랜드의 스마트폰이 나오고 있다곤 하지만 옛날의 명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결과나 다름없죠. 중간에 엘롭 같은 인물을 만나면서 결정적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화려했던 심비안 시절부터 노키아 스마트폰은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아이폰이라는 외부 충격이 있긴 했지만 거대해지고 정체화된 의사결정 구조도, 정작 제품에는 관심이 없었던 CEO도 노키아의 몰락에 일조했습니다. 노키아는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이 있었습니다. 노키아의 하드웨어 제조 능력은 뛰어났습니다. 적당한 가격에 극강의 내구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양도 괜찮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죠. Nokia N9(Lumia 800)의 디자인은 아이폰 이후 다 비슷해진 스마트폰 디자인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심비안과 마에모는 결과는 안좋긴 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도 충분했죠. 게다가 애플에게는 없었던 온갖 통신 특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키아 지도가 있었죠. 지도 서비스는 제대로된 품질을 갖추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립니다. 애플이 구글과 손절하고 만든 애플지도는 구글 지도에 비하면 품질이 턱없이 부족했죠. 애플 지도는 지금도 개선하는 중입니다. 노키아 지도(Ovi Maps)는 그 당시 구글 지도보다 더 뛰어난 내비게이션과 지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처음 출시된 노키아 스마트폰 6210s Navigator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런 지도 서비스에 특화된 모델이었습니다.(정작 Ovi Maps는 한국에서는 쓸 수 없었지만)노키아는 기초 체력은 갖추고 있었고 나름의 구제책도 갖고 있었지만 결국 리더의 의지 부족과 사업부간 갈등으로 인해 적절하게 행동해야할 때 제대로된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노키아에게 필요한건 파괴적인 리더쉽도 아니었고, 혁신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회사의 모든 의지와 역량을 하나의 방향으로 적절하게 이끌어내지 못했을 뿐이죠. 애플은 잡스 시절보다 현재는 제품 라인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소수의 제품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회사가 가진 모든 역량을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데 집중 투자합니다. 저는 노키아의 몰락이 우리나라의 LG 전자와 많이 오버랩됩니다. 한때는 세계 3위의 점유율을 갖고 있던 LG 핸드폰이지만 이제는 거의 존재감은 국내에서 밖에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업부에서는 롤러블 디스플레이로 TV를 만들고 있는데 핸드폰은 폴더블도 구현을 못하고 있죠. 무선 사업부는 손실을 계속 내고 있지만 버릴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몰락 직전의 노키아와 유사해보입니다. 가진 역량을 하나로 집중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기초체력이 튼튼해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노키아가 몸소 보여줬죠. LG로서는 결단이 필요한 때로 보입니다. 더 시간이 흐르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음…(이미지 출처 :

디에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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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노키아 스마트폰을 참 좋아했지만 더이상 국내에서는 볼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노키아 폰을 쓸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아이폰을 쓰고 있지만 가끔 노키아 스마트폰의 매력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노키아 스마트폰이 좀 더 빨리 나왔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애플의 노예가 되어버린 지금은 너무 아쉽군요.(Nokia 9 Pureview를 보고 잠깐 심각하게 고민했었습니다만..) 하지만 이러다 언젠가 한번 서브폰으로 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