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밸브의 휴대용 콘솔 Steam Deck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

밸브에서 7월 16일에 Steam Deck이라는 휴대용 스팀 콘솔을 기습 발표했습니다. 밸브가 휴대용 콘솔을 개발하고 있다는 루머는 여러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는데요, 별다른 발표 행사 없이 기습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별다른 새로운 뉴스가 없었던 가젯 커뮤니티에서 오랜만에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Steam Deck은 형태부터가 닌텐도 스위치의 대항마를 노리고 만들어진 물건인 것 같습니다. 가운데 디스플레이가 있고 양쪽에 컨트롤러가 있는 전통적인 휴대용 게임기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콘솔 게임기라기보다는 PC에 가깝습니다. SteamOS라는 리눅스 기반의 전용 운영체제가 들어가지만 사용자가 원하면 모니터를 연결해 데스크탑처럼 사용할 수 있고 심지어 윈도우를 설치할 수도 있거든요.

Steam Deck의 출시는 개인적으로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는데요, 밸브는 과거 스팀머신으로 하드웨어 분야에서 한번의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팀머신이 나온 이유 자체가 윈도 플랫폼으로부터의 독립이었는데, 스팀머신의 실패 이후 밸브는 MS와 사이좋은 행보를 이어 갔습니다. 스팀머신은 완전히 중단했고, 전용 콘솔의 출시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번 Steam Deck의 출시는 스팀머신 이후 밸브의 하드웨어 재도전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과연 이번에는 뭔가 다를까요?


스팀머신이 망한 이유

일단 Steam Deck이 잘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함에 앞서 스팀 머신이 왜 망했는지부터 짚어보죠. 참고로 저는 델에서 나온 스팀머신을 직구해가면서까지 구매했던 스팀 호구(…)입니다. 제 기대와 달리 스팀머신은 철저하게 망했죠.(하지만 하드웨어 자체는 상당히 만족스러워서 지금도 윈도 데스크탑으로 활약 중입니다.)

스팀머신은 대체 왜 망했던 걸까요? 제가 봤을 때 스팀머신이 망한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천차만별로 자유롭게 나왔던 스팀머신들

스팀머신은 스팀 전용 콘솔 컨셉으로 출시되었지만 밸브에서 제조하는게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PC 제조사들과 함께 시작했죠. 밸브는 스팀 컨트롤러를 스팀 머신에 보급하긴 했지만 스팀머신의 제조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걸 자유롭게 방치(?)했죠.

얘네들이 다 스팀머신들..

닌텐도, 엑스박스, 플레이스테이션 등의 게임 콘솔은 같은 세대 내에서는 하드웨어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콘솔을 구매하면 몇년 동안은 게임 즐기는데 문제가 없을거라는 기대로 구매합니다. 각 콘솔 제조사가 호환성을 보장하기 때문이죠. 게임 제작사들도 표준화된 하드웨어 기반에서 개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팀머신은 너무도 자유로웠던 탓에 이러한 생태계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사양을 알아보고 구매해야하고, 얼마나 오래 쓸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그냥 브랜드 PC를 고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콘솔로서 생태계 구축에 실패한거죠.

2) 리눅스 기반의 SteamOS

아시다시피 스팀에 있는 대부분의 게임은 윈도우에서만 실행되는 게임입니다. 반면 스팀머신의 운영체제인 SteamOS는 리눅스 기반이었죠. 스팀머신이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실패하면서 SteamOS에서 실행되도록 만드는 게임 제작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즉 스팀머신에서는 스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할 수 있는 게임이 많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호환성은 게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팀머신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하드웨어들 중에는 리눅스에서 호환성이 떨어지는 부품을 사용하는 제조사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델에서 나온 스팀머신조차 Nvidia 드라이버의 성능이 부족해서 윈도에 비해 게임 성능이 30% 정도 떨어지는 수준이었죠.

아마 전용 하드웨어나 표준 하드웨어를 만들었다면 SteamOS를 그에 맞게 커스텀할 수 있었겠지만 밸브는 그냥 상황을 방치함으로서 더 악화시켰습니다.

3) 애매한 포지션

스팀머신은 콘솔이라기보다 PC에 훨씬 가까운 물건이었습니다. PC랑 다를바가 하나도 없고, 심지어 SteamOS에서만 실행 가능한 독점 게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작년만해도 ‘동물의 숲 하려고 닌테도 산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독점 게임의 존재는 중요하죠. 하지만 스팀머신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은 그냥 PC에서도 잘 실행되었습니다.

스팀머신의 문제는 스팀머신에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게이밍PC를 별도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게이밍PC들은 성능도 좋고 가격도 심지어 더 쌌습니다. 스팀머신을 살만한 사람들부터가 스팀머신을 구매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죠.

스팀머신의 과오로부터 교훈을 얻어 나온 Steam Deck

Steam Deck은 다행스럽게도 과거의 스팀머신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이번에는 여러가지 대책을 마련해두고 출시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앞에서 말했던 세가지 문제에 대한 대책이 확실하게 마련되어있어 눈길을 끕니다.

1) 밸브가 직접 제조

과거 표준 없이 자유분방하게 망해가던 스팀머신과 달리 Steam Deck은 밸브가 직접 나서서 제조합니다. 즉 스팀머신이라는 이름만 같고 나머지는 다 달랐던 스팀머신과 달리 Steam Deck은 딱 한가지 사양의 하드웨어만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Steamdeck을 구매하는 소비자는 일정한 성능을 기대하고 구매하고, 어쩌면 게임 제작사(밸브도 포함해서)도 Steam Deck에 최적화된 게임을 제작할 수도 있겠죠. 과거와 달리 Steam Deck을 중심으로하는 생태계를 기대해볼만해진 겁니다.

2) SteamOS의 비밀무기, Proton

스팀머신은 누가봐도 망했지만 밸브는 SteamOS의 개발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리눅스 게이밍 커뮤니티와 함께 오픈소스로 SteamOS를 조금씩 개선해왔죠. 그 기간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특히 SteamOS에서 발전한 부분은 윈도우 게임을 호환시켜주는 레이어인 Proton이었습니다. Proton은 맥이나 리눅스에서 윈도 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Wine과 Vulkan이 결합한 결과물입니다. 말하자면 좀 더 성능 좋은 Wine이랄까요? Proton이 발전하면서 초반과 달리 SteamOS의 게임 호환성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Proton의 호환성을 알 수 있는 ProtonDB 사이트에 의하면 현재 상위 인기 게임 100개 중 78%, 상위 1,000개 게임 중 76%의 게임을 Proton을 통해 SteamOS에서 실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Steam Deck의 홍보 영상에서도 윈도 전용 게임인 Control이나 Starwars : Fallen Order를 실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 휴대용 게임기

밸브는 왜 Steam Deck을 휴대용 게임기로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기존 스팀머신의 애매한 포지션 문제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스팀머신은 거치형 콘솔로서 게이밍PC나 기존 콘솔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지만, Steam Deck은 휴대용 게임기입니다. 게이머라면 아무리 게이밍 PC나 콘솔을 갖추고 있어도 휴대용 콘솔하나 쯤은 더 마련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에서의 모바일 게임에 만족하지 못해 스위치를 구매하려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Steam Deck에 관심을 더 기울일 수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갖고 있는 스팀 게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게 가장 강점이겠죠. 저 같이 기기를 많이 갖고 있는 경우에도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디바이스인거죠.


개인적으로 아직은 부정적인 이유

Steam Deck은 스팀머신의 여러가지 문제를 수정했고, 휴대용으로서 거의 모든 스팀 게임을 실행할 수 있고, 조금의 조작을 가하면 모든 에뮬 게임도 제한없이 실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매력적인 디바이스입니다. 사실 저도 매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Steam Deck의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데요, 몇가지 걸리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시시점에 비해 미묘한 스펙

Steam Deck의 그래픽 사양은 1.6TFlops(테라플롭스)로 수치상으로 봤을 때 엑스박스원S와 플레이스테이션4 사이에 위치하는 성능입니다. 즉 전세대 콘솔, 그것도 하위 라인업 수준이라는 것이죠. 말이 좋아 전세대 콘솔이지, 저 두 기기는 출시된지 10년이 다되어 갑니다.

물론 같은 휴대용 라인업의 닌텐도 스위치보다는 훨씬 좋은 성능을 갖고 있습니다. 솔직히 스위치 성능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안좋긴 하죠. 하지만 스위치에서는 스위치에서 실행될만한 게임만 구동됩니다. 그리고 그 게임들은 그래픽이 좋지 않아도 충분히 인기있고 재미있는 게임들이죠.

Steam Deck에서 실행되는 스팀 게임들은 Steam Deck만 노리고 만들어진 게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PC 게임들은 그래픽 수준을 경쟁하듯이 끌어올리고 있죠. 과연 아무리 저해상도라고 해도 미묘한 성능의 하드웨어로 언제까지 이런 게임들을 잘 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떨어지는 휴대성

개인적으로 가장 걸리는 부분은 사실 이 부분인데요, Steam Deck은 휴대용 게임기지만 휴대성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무게만해도 669g으로, 365g인 스위치에 비해 두배 가까이 무겁습니다. 669g 정도라면 스마트키보드를 결함한 아이패드 프로 11인치보다 무거운 무게입니다. 손에 들고 오랫동안 쓰기에 적합한 무게는 아니죠.

그냥 스위치 들고다니는게 더 낫다면 아무래도 성공하긴 어렵겠죠?

또한 배터리 시간은 공식적으로 2시간 ~ 8시간으로, 실제로 AAA 급 게임을 구동한다고 하면 최대 2시간 이하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무거운 무게를 지고 외출해도 최대 두시간 정도 밖에 할 수 없다면 휴대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겠죠.

뚜껑을 열어봐야 확인 가능한 Proton의 호환성

ProtonDB 사이트에서는 분명 인기 게임 중 70% 이상의 게임이 실행 가능하다고 하지만 과연 그 중에 별다른 세팅 없이 Out of box로 실행되는 게임이 몇개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별도의 세팅이 필요없는 Native와 Platinum 급의 게임들이 그러한 게임들인데, 30~45%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기 게임 상위 10개의 게임들(배틀그라운드를 포함해 대부분의 멀티플레이 기반 게임)은 50% 정도 호환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호환성은 출시된 게임을 따라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최신 게임을 출시되자마자 바로 즐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Steam Deck이 잘 되어서 SteamOS를 고려한 게임들이 많아진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요.

마무리

일단 저는 스팀머신까지 구매했던 소문난 스팀 호구지만 이번 Steam Deck은 일단 관망해보려고 합니다. 스팀머신을 구매했을 때와 달리 당장 게임머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휴대성이 부족한 부분이 가장 걸립니다.

가뜩이나 들고 다니는 기기가 많아서 무거운 상태인데(아이패드 프로+스마트키보드, 맥북 에어, 아이폰 11 프로…) 게임만을 위해 또 하나의 기기를 휴대하기에는 너무 무거운데다 그에 비해 배터리 시간도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요금제를 무제한으로 바꿔서 스트리밍에 투자를 할까 싶을 정도네요.

어차피 올해는 직구 외에는 살 수 있는 루트도 없고 2022년이 된다고 해도 국내에 제대로 출시될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무리봐도 저 같은 사람들만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대중적이지 않은 물건이고, 밸브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알 것 같기 때문이죠.(하지만 Steam Deck의 소개 페이지와 동영상이 전체적으로 다 한글화되어 있어서 혹시..?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드네요.)

하지만 역시 모든건 뚜껑을 열어봐야알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저는 관망하는 상태로 지갑을 대기해놓으려 합니다.(언행불일치) 부디 이번에는 좋은 평가로 이어져 SteamOS와 리눅스 게임 생태계가 부흥했으면 좋겠습니다.

덧. Steam Deck과 상관없이 SteamOS 3.0이 나오면 한번 현재 스팀머신에 설치해볼 생각입니다. 빅픽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걸로 봤을 때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나올 것 같은데 이 부분도 기대되네요. 그동안 Proton이 얼마나 나아졌을지 기대도 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