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본질은 키보드인가, 디스플레이인가?

좀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최근에 라즈베리 파이 재단에서 출시한 소형 컴퓨터인 Rasberry Pi 500 모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Rasberry Pi 500은 좀 특이한 컴퓨터인데 키보드 폼팩터를 갖고 있다. 즉 키보드 자체가 컴퓨터 본체다. 여기에 모니터만 연결하면 어떤 환경에서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 회사처럼 핫 데스크에 디스플레이만 있는 환경이라면 어떤 자리에서든 키보드만 들고 다니면서 쓸 수 있다.

여기에 같이 출시된 공식 모니터를 연결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진 않아서 휴대용 사양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상당히 저렴하면서도 가볍게 컴퓨팅 환경을 구성할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이 키보드 형태의 컴퓨터를 보다보니 문득 생각해봤다. 디스플레이와 키보드 중 어떤게 더 컴퓨터라는 본질에 가까울까? 여전히 이상한 질문이라면, 둘 중 뺴야한다면 어떤걸 빼는게 좋을까?

컴퓨터의 폼팩터 중 가장 안정적인 폼팩터는 클램쉘(조개 껍데기) 형태의 노트북이다. 노트북은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데스크탑의 많은 구성요소를 덜어내거나, 줄이거나, 내장했다.

하지만 디스플레이와 키보드가 거의 1:1 크기로 접히는 클램쉘 폼팩터를 보면 디스플레이와 키보드만은 어떻게해도 줄이지 못했다는걸 알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제거하거나 줄이면 사용성이 크게 떨어진다. 없애거나 줄이기로 유명한 애플조차 맥북은 40년이 되도록 클램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는거다. 내가 미니멀리즘의 극치였던 2010년 이전의 애플에서 스티브 잡스로부터 직접 맥북의 클램쉘 형태를 혁신하기 위해 디스플레이와 키보드 중 하나를 반드시 제거하라는 미션을 받은 디자이너라고.(그리고 내일 당장 스티브 잡스가 눈 시퍼렇게 뜨고 시안을 원한다면?)

그럼 나는 둘 중 무엇을 뺄 수 있을까? 둘 중 제거할 수 없는 쪽이 좀 더 컴퓨터의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물론 본체가 제일 본질이니까 본체는 후보에서 제외하자.)

당연히 디스플레이 아닐까?

우리가 컴퓨터라는 물건을 머리 속에 떠올려보면, 디스플레이를 가장 크게 그린다. 컴퓨터 이모지를 봐도 💻 🖥️ 디스플레이가 더 크게 그려지는걸 알 수 있다. 심지어 🖥️ <— 이 이모지의 경우에는 모니터만 있다.(물론 아이맥이겠지만)

디스플레이가 더 본질에 가깝다는 증거는 여러 일체형 컴퓨터,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 PC를 봐도 알 수 있다. 여러 일체형 컴퓨터들은 모두 디스플레이와 본체가 일체화 되어있다. 태블릿 PC는 아예 입력을 터치스크린으로 대체해 키보드도 필요없게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컴퓨터인 스마트폰도, 손목 위의 컴퓨터인 스마트워치도, 모두 디스플레이만 갖고 있고, 입력은 터치스크린으로 대체해버렸다. 이미 세상 대부분의 컴퓨터들은 디스플레이만 달고 있다.

이렇게 현실의 여러가지 증거들만 봐도 당연히 디스플레이가 컴퓨터의 본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애플의 디자이너였다면, 그리고 실제의 애플 디자이너들도 그랬듯이, 디스플레이를 통합하고 입력 장치를 터치스크린으로 만든 뒤 키보드를 먼저 제거해버릴 것이다.

아냐 모두 착각하고 있어, 사실은 키보드야

올해 초, 이상한 유행이 테크 커뮤니티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헤드리스 맥북(Headless Macbook). 머리가 없다는 뜻 그대로 디스플레이가 제거된 맥북을 뜻한다.

출처 : Reddit

처음에는 디스플레이가 망가진 맥북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인증 글에서 시작됐지만, 서서히 중국에서 이런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에서 의외로 쓸만하다는 간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머리없는 맥북은 휴대가 가능한 컴퓨터지만 디스플레이가 반드시 있어야 쓸 수 있다. 사용자는 디스플레이를 제외하고 키보드와 본체, 스피커만 일체화된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닌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게 편하다고 하는걸까?

내가 생각하기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생산적인 작업을 할 때는 확실히 키보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쓸 때 사람들은 키보드를 보지 않고 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아이패드의 화상 키보드는 안치고 쓰는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만약 휴대용 모니터를 쓸 수 있는 환경이라면 디스플레이보다 키보드가 일체화된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게 휴대성 측면에서도 훨씬 가벼울 것이다.

또 하나는 디스플레이라는 틀 안의 제약이다. 맥북만 봐도 13인치, 14인치, 15인치, 16인치 등 화면 크기별로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 화면 크기가 커지면 부피도 커지고 무게도 증가한다. 하지만 이 네가지 크기의 맥북들이 의외로 키보드 크기는 차이가 없다. 디스플레이의 물리적 제약 때문에 나눠져 있는거다.

그러면 디스플레이의 제약이 사라지게 되면 어떨까? 13인치 폼팩터의 컴퓨터로도 16인치나 20인치 이상의 디스플레이를 쓸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게 있을까?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위의 헤드리스 맥북을 비전프로와 결합해서 쓰는 사례가 존재한다. 아래 이미지는 M1 맥북 에어를 비전 프로의 맥북 미러링 기능으로 연동한 것이다.

키보드와 일체화된 컴퓨터의 장점은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디스플레이 크기로 인해서 불필요하게 커지고 무거워지는 문제점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다. 적합한 디스플레이만 있다면 어떤 크기로든지 사용할 수 있고, 심지어 공간 컴퓨팅을 이용해 가상에서 무한히 화면을 확대할 수도 있다.

이쯤되면 생산성을 위해서는 디스플레이보다는 키보드를 남겨놓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잊지 말자.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2 도 키보드 일체형 컴퓨터였다.

그래서 승자는..

이 질문은 컴퓨터에서 입력 장치만 남길래, 출력 장치만 남길래가 아니라, 키보드라는 장치를 대체 입력 장치인 터치스크린으로 대체하는게 낫냐, 디스플레이라는 장치를 외장 디스플레이나, 비전프로와 같은 대체 출력 장치로 대체하는게 낫냐라는 질문에 가깝다.

지금까지는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승자는 디스플레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컴퓨터들은 디스플레이와 일체화된 디자인을 갖고 있다. 당장 스마트폰만 봐도 그렇다. “화면”이라는 물리적 틀 안에 갇혀 있는 세상에서는 당분간 디스플레이가 승자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 컴퓨팅 세상이 일반화되어 화면의 물리적 제약이 사라진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일 것 같다. 어쨌든 컴퓨터로 뭔가 작업을 하려면 키보드는 있어야 한다. 이건 인공지능 시대가 오든 공간 컴퓨팅 할아버지가 오든 변하지 않을거 같다.(애초에 AI한테도 키보드로 일 시킨다) 화면의 물리적 제약이 사라진다면, 컴퓨터가 키보드와 일체화되는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맨 처음에 예로 든 애플의 디자이너였다면, 지금은 당연히 키보드를 빼고 아이패드 같은 물건을 만들겠지만, 공간 컴퓨팅이 일반적인 미래 세상이라면 애플2 같은 형태의 키보드가 일체화된 노트북(그걸 노트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을 디자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미래의 정답은 키보드 일체형 컴퓨터일지도?

마무리

물론 클램쉘 폼팩터는 현대 노트북의 표준이자,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정답이 내려져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답이 내려진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한번 더 풀어보는 것은 재밌다.

세상의 많은 물건은 당연히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형태는 많은 실험과 실패의 결과물이다. 또한 지금의 정답 또한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한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덧. 참고로 이 글은 예전에 썼던 글의 후속이다. 전 글에서 미래 컴퓨터의 모습에 대해 폼팩터에 대해서 써보겠다고 했는데 이제야(4년만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