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NS에 아이폰 15 프로의 사진 문제를 제기한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폰 15 프로로 찍은 사진이 너무 창백하게 나온다는 글이었죠. 어떻게 찍어도 멋 없는 사진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건 멀리갈 것도 없이 제가 아이폰 15 프로로 찍은 사진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래 사진을 한번 보시죠.
이 사진은 제주도 도두반점에서 찍은 사진인데요, 무보정 사진입니다. 딱 봐도 별로 먹고 싶지 않게 나왔습니다. 탕수육의 색은 실제보다 훨씬 창백하게 나왔고, 소스의 색깔도 너무 하얗게 나왔습니다. 짬뽕 쪽도 뭔가 물 탄 것 같은 느낌이죠.
아래는 같은 장소에서 2018년에 아이폰 7 플러스로 찍은 사진입니다.
여전히 아이폰 특유의 플랫한 색감이지만 아이폰 15 프로보다는 좀 더 먹고 싶게 생겼습니다. 음식의 색깔도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오이의 색상이나 소스의 색깔도 훨씬 진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죠.
카메라 하드웨어 스펙은 당연히 시간의 흐름만큼 아이폰 15 프로가 훨씬 좋을텐데 사진의 결과물만 봤을 때는 그렇게 평가하긴 어려워보입니다.
이 현상은 아이폰의 특징 중 하나인 스마트 HDR 기능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어두운 영역은 밝게 촬영하고 밝게 나온 부분은 어둡게 처리해서 최대한 디테일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디테일을 살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사진이 재미가 없고, 마치 물에 한번 행군 것처럼 나온다는 겁니다.
이 느낌은 사실 디지털 카메라에서 RAW로 찍었을 때도 비슷한데, RAW는 이렇게 사진의 디테일을 다 담고 있기 때문에 보정에 유리합니다. 그래서 전문 사진가들도 RAW로 사진을 찍은 다음 후에 보정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합니다.
위에 있는 아이폰 15 프로의 사진은 RAW 형식은 아니지만, 디테일을 최대한 살린 덕분에 후보정에 유리합니다. 어쩌면 아이폰의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가 지향하는 바랑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확실히 전문적인 작업에는 유리할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찍는 사진은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후보정을 염두에 두고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이폰 15 프로의 사진 결과물이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겁니다.
아이폰 카메라가 똑딱이였던 시절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10년으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이폰4 발표 때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카메라”라고 일컬었습니다. 사진 공유 서비스였던 Flickr 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사진이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었거든요.
아이폰이 인기 있는 카메라가 된 이유는 카메라 하드웨어가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항상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였기 때문이었죠. 가장 좋은 카메라가 아니라 가장 접근성이 좋은 카메라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냥 카메라를 아무 생각 없이 대상을 가리키고 찍으면 되는 카메라를 영어로는 Pointing-and-Shoot 카메라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는 의미로 “똑딱이” 라고 부르죠. 아이폰은 최고의 똑딱이였던 겁니다.
똑딱이 카메라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흔히 요즘 부르는 감성샷이라는 사진들이죠. 요즘 젊은 세대들이 최고의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똑딱이를 찾는 이유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이 사진은 제가 갖고 있는 똑딱이 카메라인 Canon IXUS 115 HS로 찍은 사진입니다. 아이폰 15 프로보다 화소수도 낮고 하드웨어 스펙도 딸리지만 무보정 결과물만 보면 아이폰 15 프로의 결과물보다 훨씬 나아보입니다.
아이폰 XS까지는 이런 똑딱이의 특징을 잘 살려왔지만, 아이폰 11 프로부터 “프로급 카메라”를 표방하면서부터 딥퓨전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똑딱이로부터 점점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원래도 스마트폰은 부족한 카메라 하드웨어를 보완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후 보정을 했지만 아이폰 11 프로부터는 딥퓨전과 스마트HDR 등 의 기술을 이용해 좀 더 적극적으로 보정 처리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스마트 HDR은 사진을 다양한 조명을 기준으로 찍은 다음 합치기 때문에 역광이라고 할지라도 사진의 디테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창 밖의 광원이 훨씬 밝아도, 실내의 피사체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능이 맨 위의 물에 씻은 것 같은 탕수육 사진의 원흉이기도 하죠. 밝게 나온 부분은 어둡게, 어둡게 나온 부분은 밝게 처리해주면서 사진이 밍숭맹숭해지는 겁니다.
이렇듯 아이폰에 “프로급 카메라”가 달리면서부터 아이폰은 사진을 그냥 찍지 않고 엄청난 컴퓨팅 성능을 활용해 사진에 많은 처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발전 방향은 똑딱이보다는 후보정에 유리한 “프로급 카메라”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죠. 아이폰 15 프로, 나아가 아이폰 16 프로까지도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똑딱이로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카메라”였던 아이폰은 그냥 아무렇게나 찍어도 되는 똑딱이와는 거리가 먼 카메라가 되었습니다. 이젠 그냥 찍어서는 제대로 안나오고, 후보정을 반드시 고려해야합니다. MZ 세대는 손 안에 엄청나게 좋은 카메라를 들고 있음에도 리코 GR이나 후지필름 X100VI 같은 똑딱이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구요.
아이폰 16의 “사진 스타일” 기능
이번에 아이폰 16 시리즈와 함께 발표된 카메라의 주요 기능은 두가지인데 카메라 컨트롤이라는 하드웨어 버튼과 새로운 사진 스타일 기능입니다. 제가 이번 아이폰 16 업데이트에서 주목한건 하드웨어 부분의 카메라 컨트롤이 아니라 사진 스타일을 대대적으로 업데이트했다는 겁니다.
사진 스타일 기능은 단순히 필터 기능처럼 결과물을 나중에 보정 처리 하는게 아니라 아이폰이 사진을 찍는 이미지 프로세싱 단계에서 지향점을 알려주는 기능에 가깝습니다. 아이폰이 어떻게 이미지를 처리할지 사용자가 지침을 알려주는거죠.
사진 스타일은 아이폰 13에 처음 도입된 기능입니다. 아이폰 13부터 아이폰 15 시리즈까지는 톤과 색 온도라는 두가지 축을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었죠.
아래 사진들은 아이폰 15 프로에서 사진 스타일 기능으로 찍은 사진입니다.(무보정)
맨 위에 있는 탕수육 사진과 달리 조금 더 생생한 색감이 살아있죠. 해당 사진은 톤을 50 정도 내리고 색 온도를 25 정도 따뜻하게 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이폰 15 프로가 색을 차갑게 찍고 플랫하게 찍는 경향이 있다보니 톤을 내려주고 색 온도를 낮춰주면 좀 더 생생한 색감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아이폰 16 시리즈는 이 사진 스타일 기능을 대폭 개선해서 좀 더 개인화하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아이폰 16은 사용자 라이브러리에서 사진을 4장 정도 선택해서 그 중 사용자가 선호하는 색감과 톤을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진 스타일을 커스텀하면 해당 사진 스타일이 사용자 아이폰의 기본 스타일이 됩니다.
사진 스타일은 장면이나 조명, 계절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중에도 커스텀할 수 있는 기능을 좀 더 강화했습니다.
카메라 앱에서 카메라 컨트롤을 통해 사진 스타일을 쉽게 커스텀할 수도 있고,
사진을 찍고 난 다음에도 적합한 스타일을 바꿀 수 있도록 했습니다. 뭔가 이미지 프로세싱 과정을 다시 디자인한건지 아이패드나 맥에서도 아이폰 16으로 찍은 사진만 사진 스타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아이폰 16에 들어간 사진 스타일 기능이 애플이 최근 아이폰 카메라에 내린 솔루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폰의 기본 카메라 하드웨어는 현실을 최대한 담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할테니 사용자가 선호하는대로 색감과 톤은 직접 커스터마이징하라는거죠.
저는 카메라 컨트롤보다 이 사진 스타일 기능의 개선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는데요, 이제 카메라 하드웨어와 컴퓨팅 성능의 발전,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인해 사용자가 카메라의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감이 다르고 톤이 다르고, 또 피부색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세팅으로는 모든 사용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예전에야 사진 커뮤니티에서 어떤 카메라가 더 잘 나오고 어떤 카메라가 색감이 따뜻하니 레트로하니 이런 논쟁이 있었지만, 이젠 하나의 하드웨어로 여러 스타일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겁니다.
예전에 라이카에서 M111 모노크롬이라는 모델이 있었는데요, 아예 센서 단위에서부터 흑백 사진만 찍을 수 있게 만든 카메라입니다.
그냥 컬러 사진을 찍은 다음에 흑백 처리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카메라 역시 이미지 프로세싱이 흑백에 최적화되어있어서 컬러를 흑백으로 처리하는 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대비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상당히 자연스럽죠.
아이폰 16 시리즈의 사진 스타일에는 모노크롬 B&W 라는 스타일이 있는데, 이것도 원리적으로는 비슷합니다. 사진 이미지 프로세싱 단계부터 흑백에 최적화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는거죠.(물론 라이카랑 똑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원리가 그렇다는거죠)
애플은 사진 스타일 기능을 통해 스타일에 따라 여러 렌즈, 여러 바디를 오가면서 찍을 필요 없이 아이폰 하나로 모든 사용자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매우 직관적인 UI로 말이죠. 물론 이 사진 스타일에도 어느정도 한계는 있지만, 사진 스타일을 잘 쓴다면 훨씬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아마 아이폰 이후로 많은 스마트폰에도 이런 비슷한 기능이 탑재될겁니다. 즉 기본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잘 나오던 똑딱이의 시대는 이제 가버린거죠. 필터나 보정을 넘어서 카메라의 이미지 처리 방향 자체를 나의 니즈에 맞게 커스텀할 수 있는 개인화된 카메라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카메라 컨트롤도 단순한 셔터 버튼이 아니라 카메라 설정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죠.)
하지만..
하지만 이런 흐름이 과연 좋기만한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이폰을 쓰는 사용자 중 50%는 이런 설정을 전혀 바꾸지 않고 쓸겁니다. 아예 설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용자도 다수겠죠. 모두가 사진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그렇구요.
우리에겐 프로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일반 아이폰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일반 아이폰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아이폰 프로 모델과 동일하다는 겁니다.(물론 스펙의 차이는 있지만요) 일반 아이폰에서도 위에서 이야기한 복잡 다단한 설정을 해야하고, RAW 같은(그러나 JPG인) 물에 씻긴 듯한 보정에 유리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일반 아이폰이 아이폰 프로 모델과 차별화 되어 일반인이 쓰기 쉬운 가장 최적의 기본 세팅을 갖춘다면 어떨까요? 프로 모델은 미러리스나 DSLR처럼 커스텀과 보정이 가능한 전문가의 영역으로 두고, 일반 아이폰 모델에서는 다시 똑딱이의 시대로 회귀하는거죠. 단순히 상위 모델, 하위 모델의 관계가 아니라 일반 아이폰과 프로 모델의 카메라의 지향점 자체를 다르게 하자는거죠.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일반 아이폰 모델은 기존 똑딱이를 쓰던 일반 사용자 층을 다시 타겟할 수 있을거고, 프로 모델은 정말로 전문가들이 쓰는 모델이 될 수 있을겁니다. 아이패드와 아이패드 프로, 맥북 에어와 맥북 프로의 관계처럼 좀 더 명확해지는거죠.
이미 저도 아이폰 15 프로에서 사진 스타일과 여러 설정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커스텀해서 쓰고는 있지만, 기본 상태에서도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도 잘 나오던 Pointing and Shoot, 똑딱이 시절의 아이폰의 사진이 그립습니다. 지금처럼 찍을 때마다 톤과 온도를 맞춰줘야 하는 복잡한 “프로급 카메라” 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