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첫 컴퓨터에 이은 옛날 이야기 시리즈 두번째. 내 첫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제 스마트폰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생각보다 인생에서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얼마되지 않았다. 근데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 17 년 째가 되가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인생의 절반 정도는 스마트폰을 쓰긴 한 것 같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한국 시장의 핸드폰이라는 물건은 답답한 물건들 뿐이었다. 나는 주로 CYON을 썼었는데 아카펠라니, 듀얼 디스코 폰(?)이니 여러 기믹이 들어가긴 했지만 전화라는 기능 외에는 별 쓸모 없는 기능들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반 학교에서 통신사 다니는 부모를 둔 친구가 들고온 기기 하나가 새로운 충격을 줬는데 바로 PDA와 전화기를 통합한 “PDA 폰”이었다. 윈도 모바일이었는지 윈도우CE였는지 모르겠지만 범용 운영체제를 탑재한 손바닥의 컴퓨터가 안그래도 이런 쪽에 관심 많았던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내 형편에 그런 기기를 살 수는 없었다. 그냥 그림의 떡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애플에서 아이폰이 출시되었고, 전세계 핸드폰 시장에 강한 충격을 줬다. 국내에서는 계속 다음 달, 다음 달로 미뤄지다가 KT에 의해 처음으로 아이폰이 출시되었다. 통신사가 통제하던 피처폰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던 국내 핸드폰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때 나도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갖게 되었다.
그럼 당연히 내 첫 스마트폰은 아이폰이었을까? 아니다. 그 와중에 내 첫 스마트폰은 Nokia 5800 Xpress Music 이었다. 지금 이 블로그에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원래 신실한 애플“까”였다. 사실 처음 이 블로그의 Apple 카테고리도 애플을 까기 위해 만든 카테고리였다. 그 당시엔 애플과 관련된 모든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윈도우도 싫었기 때문에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윈도우 모바일 계열의 스마트폰도 선택지에서 제외였다. 그래서 선택하게된 게 제 3지대, 심비안을 쓰던 Nokia 5800 이었던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나왔다면 안드로이드를 썼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땐 안드로이드 폰은 선택지에 없었다.

Nokia 5800 Xpress Music은 심비안 계열에서는 최초로 전면 터치스크린을 탑재한 스마트폰이었다. 사실 심비안은 키패드가 있는 전통적인 폼팩터의 전화기에 최적화된 운영체제였지만 아이폰이 인기를 끌면서 급하게 터치스크린으로 뜯어 고쳐서 출시한 전화기였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스타일러스가 필수였다. 기본적인 스크롤도 터치에 맞지 않아서 스크롤바를 잡고 끌어내려야 하는 방식이었다(…) 나중에야 아이폰처럼 화면 아무데나 잡고 스크롤할 수 있도록 펌웨어 업데이트 되었지만 노키아 펌웨어의 특성상 통신사에서 배포를 해줘야 했는데 KT에서 아~~주 한참 후에야 업데이트 해줘서 쓰면서 계속 고통 받았다.

5800은 그 이름에서 거대 핸드폰 제국 노키아가 그 당시 아이폰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아이폰에 대응하기 위한 노키아 최초의 전면 터치스크린 폰이 “Xpress Music”이라는 음악 특화 폰이라니.(플래그쉽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키아는 아이폰을 그냥 아이팟에 전화 기능 들어간 정도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키아에서 아이폰의 대항마로 출시한 모델이긴 했지만 당시 아이폰에 비교하면 여러모로 딸리는 스마트폰이었다. 일단 하드웨어 가속기(GPU)가 없어서 3D 가속이 아예 불가능했다. 성능도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나마 심비안이 워낙 가벼운 운영체제라 체감 속도에 문제는 없었지만. 트위터조차도 가볍게 할 수 없었다.
이런 성능 차이는 그 당시 게임만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동일한 시기에 출시된 아이언맨2 게임(Gameloft 제작)을 5800에서 실행한 모습과 아이폰에서 실행한 모습을 비교해봤다.


분명 동일한 시기에 나온 동일 게임 맞다. -_- 아이폰 쪽은 지금보면 저해상도이긴 해도 3D이지만 5800 쪽은 2D에 가짜 3D 오브젝트를 이용해서 만든 게임이다. 아이언맨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게임이 이런식이었다. 이미 아이폰 기준으로 맞춰진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추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쓰면서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던 스마트폰이긴 했지만 그래도 5800 은 첫 스마트폰으로서 나에게 처음으로 모바일 환경에서 자유를 안겨주었던 스마트폰이었다. 아이폰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원되는 여러 앱이나 게임도 자유롭게 설치해보고, Wifi 지원을 통해 통신비 걱정 없이 인터넷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5800에서 가장 히트했던 앱(?)은 트위터 클라이언트 Gravity였는데, 운영체제에서 지원되지 않는 모든 기능을 자체적으로 만든 앱이었다. 키네틱 스크롤, 당겨서 새로고침 등 아이폰에서만 지원되는 여러가지 기능을 5800으로 가져다주었다.
트위터 클라이언트이긴 했지만 RSS Reader, Facebook 클라이언트 등 여러가지 기능이 있어서 사실 5800을 쓰는 내내 거의 이 앱만 썼던 기억이 난다.

5800의 기억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카메라 렌즈가 칼자이쓰의 Tessar 렌즈였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카메라 콜라보 같은건데, 샤오미의 라이카 폰이나, 오포의 핫셀블라드 콜라보 같은 일종의 마케팅적인 요소였다.
여러가지로 아이폰보다 떨어지던 스마트폰이었지만, 의외로 카메라는 쓸만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구매했던 Nokia 710 보다 5800 쪽이 카메라 품질은 더 좋았다.


빛만 충분하면 꽤 품질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빛이 충분하지 않으면 영 우중충한 사진이 나왔지만 이건 뭐 그 당시 스마트폰들은 다 그랬으니까.
여러모로 부족한 스마트폰이긴 했지만 2008년에 구매해서 2011년까지 썼으니 거의 4년 가량 썼다. 스마트폰을 한번 사면 오래 쓰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 치고 엄청 오래 썼던 것 같다.
이후 윈도우폰 기반의 Nokia 710으로 노키아 브랜드의 스마트폰을 한번 더 썼지만 Nokia 710은 운영체제, 하드웨어 품질이 5800보다 더 최악이었기 때문에 노키아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접고 아이폰5로 넘어갔다. 그 이후로 스마트폰은 계속 아이폰만 쓰고 있다.(아이폰 5 > 아이폰 7 플러스 > 아이폰 11 프로 > 아이폰 15 프로)
그 이후 노키아는 이동통신 기기 제조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하고 통신 설비 제조 부문에 집중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후에는 HMD에서 제조한 노키아 브랜드의 ODM 폰이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출시되기도 했지만 큰 반향을 이끌어내진 못하고 있다.
그때 주로 5800으로 했던 것들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스마트폰으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때는 5800으로 주로 사진 찍거나 트위터를 하거나 동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들었는데 지금 아이폰 15 프로로도 사진을 찍거나 블루스카이를 하거나 동영상(유튜브)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5800은 그때 스마트폰으로는 드물게 핫스팟도 지원했으니 사실 용도만 본다면 지금이나 그때나 하는건 똑같은 거 같기도?
이렇게 보면 나는 예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주로 사용하는 기기가 노트북이나 태블릿 같은 것들이라 스마트폰을 주로 사용하진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아이폰도 원래 일반 모델로 갈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15 프로 모델을 선택했는데 무거워서 약간 후회하고 있다. 다음에 아이폰을 바꾸게 되면 무조건 무게를 고려해서 바꿔야 할 것 같다.
주로 사용하는 기기가 노트북류이긴 하지만 내 모바일 생활에 자유를 안겨주었던 5800 만큼은 첫 스마트폰으로서 많은 추억이 있다. 지금도 가끔 서랍에서 꺼내보곤 하는데 이젠 아무리 충전해도 아예 켜지지 않아 아쉽다.
덧. 혹시 5800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다면 이 블로그에 있는 5800 리뷰를 참고해주시길.